카라얀과 번스타인

현대 지휘의 두 거목을 생각하며

by 호림

20세기 후반부 신대륙과 구대륙을 대표할만한 지휘자의 이름으로 해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레너드 번스타인을 지목하는데 주저하는 클래식 팬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유명세만큼이나 팬들의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지만, 마에스트로로서의 아우라는 아직도 클래식 음악계에 전설로 남아있다.


서민 가정 출신의 소탈함과 함께 어떤 무대이든 유머러스한 입담으로 주면을 즐겁게 한 미국 신사가 번스타인이다. 우크라이나계로 아버지가 이발사였던 번스타인은 좌충우돌의 젊은 시절도 있었으며, 동성애자 논란이 잇달았다. 세 자녀를 두었이니 양성애자로 볼 수 있다.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주제 음악 작곡, 청소년 음악교육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보여주듯 번스타인은 클래식의 대중성에 관심이 많아서 클래식 유일신앙과 교조주의적 엄밀성에 반기를 드는 모습도 보였다. 대놓고 카라얀을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라이벌 의식을 느꼈음인지 탐탁지 않은 듯 은근히 견제하기도 했다. 두 거장은 한두 번의 짧은 만남을 가졌고 번스타인이 지휘계의 선배 카라얀을 뉴욕 필 객원지휘로 초대하는 등 존경의 마음을 표하기도 했다.

폰(von)이 이름 가운데 붙어있어 짐작할 수 있듯이 유복한 귀족 출신의 카라얀은 지역 유지인 부친의 후광도 입었다. 20대에 데뷔해 생의 후반부는 1955년부터 1989년 사망할 때까지 베를린 필의 종신 음악감독을 맡아 베를린 필의 심장으로 화려한 명성과 함께 명반을 낳았다. 나치 부역의 그림자는 그의 발목을 잡는 듯했지만 그의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이를 극복하고도 남았다. 유능한 주자가 있으면 자신의 수족처럼 베를린 필에 영입해 마치 자신의 악기 인양 부릴 수 있는 카리스마를 휘둘렀지만, 결국 클라리넷 주자 자비네 마이어 영입과 관련 한 스캔들은 그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음악 해석에 있어서도 기계적인 엄밀성보다는 스스로가 작곡가로서 넓은 범위의 해석을 표방한 번스타인은

정교함이란 잣대로는 카라얀에 비할 바 없다고 할 수 있다. 카라얀은 지독한 엄밀성을 요구하는 연습시간에 단원들이 반발할 정도지만 그런 카리스마로 베를린 왕조를 30여 년간 이끌었다. 시대적으로 방송의 전성기와 음반의 황금시대를 꿰뚤어 본 카라얀은 엄청난 부를 쌓기도 했다. 자신이 선 포디엄을 잡는 각도를 보기 위해 지휘 대역을 써서 리허설을 하고 언제나 연주의 중심에는 은발을 휘날리는 자신이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카라얀이었다.

최고를 다투던 빈 필과 뉴욕 필이 있었지만, 베를린 필의 아성은 결코 넘보기 힘든 면이 있었다. 카라얀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대는 흘렀고 곱슬머리에 자유분방한 차림으로 클래식의 권위를 조롱하듯 자유분방한 영국 청년이 등장했다. 베를린 필 포디엄에서도 조크를 즐기던 사이먼 래틀은 카라얀의 그림자를 지우려는 듯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아마도 지하의 카라얀은 자신의 이름이 다른 지휘자들과 함께 거론되는 것에 까칠하게 불편함을 표할지도 모르겠다. "내 이름을 번스타인, 래틀 같은 엉터리들과 함께 거론하다니" 하면서.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뱅글러, 카라얀, 번스타인... 클래식 음악의 20세기는 마에스트로의 이름과 같이 기억할 만하다. BTS의 음악이 요란하게 들리는 시대에 21세기 클래식의 설 자리는 비록 작고 초라할지도 몰라도 후세 클래식 사가들은 많은 흥미로운 지휘의 역사를 기록할 것이다. 남미 빈민촌에서 나와 당당하게도 LA필의 포디엄을 장악한 구스타프 두다멜, 서울 시향과의 불협화음 속에 서울과 도쿄를 오갔던 정명훈... 변방이 중심부가 되고 비주류가 주류가 되는 거대한 역사의 순환처럼 문화에도 지금은 잘 보이지 않는 어떤 흐름이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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