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을 허용하는 마음

예술의 풍부함을 받아들이는 방식

by 호림

우연히 라디오를 켰을 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가끔 만나는 친구와는 특별히 식당을 정하지 않고 만나기도 한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우연히 좋은 음식점을 발견하는 기대감을 가지게 된다. 대개는 안목이 넓은 친구가 정해주는 식당을 가면 새로운 맛과 분위기를 발견하게 된다. 식당을 정할 때는 내 미각이 별로인 탓도 있지만 나에게 검증된 가게만 고집하기보다 우연성이 주는 '세렌디피티'를 기대하는 편이다.


우리는 수많은 스케줄을 휴대폰에 빼곡히 채우고 검증된 어떤 인물이나 장소를 만나려고 조그만 틈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성공이라고 믿고 사는 듯하다. 자신이 계획대로 정한 필연보다 때로는 특별한 우연에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작은 여유도 필요하다.

잠시라도 휴대폰을 보지 않으면 천지개벽할 일이 일어날 것처럼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상대방과의 대화에 주목하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병일 수도 있다. 창가의 풍경이나 무심히 자연을 바라보기도 하다 보면 우연이 주는 선물을 얻을 수도 있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시간을 넉넉하게 한 덩어리 떼어주는 것이 아까운 사람들과 깊은 지성과 감성의 교감이 필요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삶의 낭비일 수도 있다.


우리가 고흐의 초상화나 모네의 수련, 모나리자의 미소, 로스코의 그 단순한 추상화 앞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교육받은 지성의 힘 때문 만일까. 그런 지식이 없어도 어떤 상황이나 순간은 우리를 풍성하게 존재하는 행복을 안겨주기 때문에 명화로 남은 것일 수도 있다. 명화들은 철저한 계획과 지식으로만 이뤄지는 감상이 아닌 우연한 시선도 붙잡을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베토벤의 교향곡 넘버가 헛갈리고 말러와 부르크너를 착각하거나, 렘브란트와 페에르메르의 그림을 혼동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고전주의, 인상주의 같은 예술 유파를 줄줄 꿰지 못한다고 감상할 자격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자기 주도로 모든 걸 결정하고 심지어 식당 메뉴까지도 상대방의 의견을 제약한다면 우리는 필연성의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 뇌에 저장된 그 많은 정보나 지식은 사실상 계획된 것보다 우연성으로 얻어진 것이 많을 수도 있다. 우연히 서점에서 집어 든 책 한 권, 우연한 만남이 가르쳐준 것들이 필연에 의한 것보다 결코 적지 않다. 거슬러 올라가면 부모님은 우연한 만남으로 연애를 하고 사랑을 했을 수도 있고 내가 태어난 것도 그 우연의 연장선상에 놓여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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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히 계획된 삶은 기계의 것일 수도 있다. 음악도 철저히 자신이 보유한 음반에 한정해서 그 LP판이나 CD를 선택해서 듣는다면 우연이 주는 즐거움은 없다. 라디오를 켜면 우연히 원하는 음악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어떤 경우는 기가 막히게 듣고 싶었던 곡이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나오면 그 우연성이 주는 행복에 감격할 때가 있다.


갤러리에서 어떤 무명작가의 작품이 시선을 붙잡을 때도 있다. 우연에 마음을 열어주는 마음, 교과서에서 본 작품이나 매스컴에서 찬양한 작품이라고 주위에서 추천을 해도 귀를 막을 수 있는 태도는 우연성에 열린 자세다. 때로 예술은 그 우연성을 받아들이고 선입견과도 과감히 결별할 수 있는 이에게 많은 선물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것은 항상 기이한 것이다.

- 보들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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