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작품이고 인생
빗속을 뚫고 온 제자는 표정이 밝지 않았다. 지방대 출신으로 대학원 공부를 해 석사 타이틀로 학력세탁을 하겠다며 농담을 할 정도로 씩씩했던 기백은 온 데 간 데 없고 자신의 터덜거리는 삶에 대해 털어놓는다. 추천해 줄 직장은 있는지도 물었다. 대화의 재료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예술 관련 이야기를 안주로 내놓았다.
세계 미술품 시장은 놀라운 경매 역사를 써왔다. 가장 극적인 장면 중의 하나는 반 고흐의 작품으로 1990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연출됐다. 현재 세계 미술시장에는 꾸준히 새로운 블루칩이 등장하고 있지만 반 고흐의 전성시대도 있었다.
서른세 살의 반 고흐가 파리에 있을 당시 그는 식료품을 사기 위해 고물상에 그림을 헐값에 팔았는데 고물상은 그 그림은 두 번 다시 볼 생각도 않고 유화칠을 벗겨내고 중고 캔버스로 재생해서 팔았다고 한다. 이 정도면 그래도 나은 편이다. 무일푼의 고흐가 그의 치료에 대한 사례로 의사 펠릭스 레이에게 선물로 준 대부분의 그림은 끝내 거절당했고 호의를 겨우 받아들여 한 장만 전달됐다. 그 한 장도 이내 닭장의 여닫이 문으로 사용됐다.
이 가난한 화가가 생 레미 병원의 의사들에게 사례로 준 여러 장의 그림은 사격 연습용 타깃이 되기도 했다. 철저하게 무시되고 더 이상 찢길 것도 없는 자존심은 고흐 생존 시에는 복원할 수 없었다. 고흐가 이웃 영감에게 생활비로 빌린 돈을 갚을 길이 없자 그림을 손수레에 가득 실은 그림을 대신 주려고 하자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영감이 부인에게 이런 얘기를 하자 "그 친구 손수레라도 받아놓지 그랬어요" 하면서 집안의 가보가 될지도 모를 그림을 발로 걷어찬 일화도 전해진다. 이 일도 고흐가 죽은 해에 있었으니 고흐는 자신의 그림에 대한 가치를 평가받을 날을 미래세대의 몫으로 남긴 셈이다.
그 1990년의 극적인 장면은 일본의 컬렉터 사이토 료헤이가 무려 8250만 달러에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을 구매함으로써 당시 세계 회화 경매사에서 최고가를 경신한 것이다. 고작 커피 한두 잔에 그림을 바꾸었고 사례품으로도 무수히 거부당했던 고흐의 그림은 역사를 바꾸었다.
이런 이야기를 곁들이며 집으로 찾아온 청년의 어깨를 다독였다. 손수레에 실어 내다 버려야 할 것은 청춘의 찢긴 자존심이지 당신 자신은 아니라며 아직 남아있는 가능성을 보고 자신만의 인생 붓질을 결코 멈추지 말라는 말과 함께 이력서를 집어 들었다.
마침 쇼팽의 선율이 제자가 누구나 겪을 법한 지리멸렬한 청춘의 한 시절과 이별하고 새롭게 출발했으면 하는 내 마음을 아는 듯 빗소리를 뚫고 흘렀다.
(209) [ 2h Repeat ] 쇼팽 (Chopin) _ 이별의 곡(Etude Op.10 No.3 Tristesse)ㅣ사색ㅣ휴식ㅣ독서ㅣ명상ㅣ백색소음ㅣ -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