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컬렉터의 삐뚤어진 초상

by 호림

한국의 대표적인 예술품 컬렉터로 언뜻 간송 전형필과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떠오른다. 세계적으로도 구겐하임이나 폴 게티 같은 많은 미술관들은 컬렉터들의 재력을 기반으로 한 일생에 걸친 작품 수집과 심미안이 그 소중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반 고흐의 그림이 세상에 빛을 보는 데에는 그림의 가치를 지키며 보존한 한 여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반 고흐와 동생 테오가 주고받는 651통의 편지를 잘 보존해 세상에 알린 이는 요한나 반 고흐 본헤르라는 여인으로 테오의 부인이었다. 만약 요한나가 예술가와 예술작품 자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거래처를 찾아 생계비로 그림을 한 점씩 팔 궁리만 했을지도 모르고 고흐의 그림은 소장자도 정확히 모르고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요한나가 편지를 출판해 반 고흐의 예술혼을 세상에 알린 것은 반 고흐 브랜드를 만든 출발이었다. 나아가 미술품 하나하나의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기에 2천여 점을 고흐 가문의 보물만이 아닌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을 비롯한 전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지킬 수 있었다.


사이토 료에이라는 일본의 괴짜 기업인이 생각난다. 1990년 5월, 사이토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반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을 당시 최고가인 8250만 달러(125억 엔)에 낙찰받았다. 이어 그는 미술 경매사에 남을 연타석 만루홈런을 쳤다. 이틀 후에는 소더비 경매에서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래트’를 7810만 달러 (약 118억 엔)에서 매수한 것이다.


세계 미술 시장에 화려하게 등장한 컬렉터의 유명세는 순식간에 악명으로 바뀌었다. 자신이 죽으면 2장의 명화를 관에 함께 넣어달라고 말한 것이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아트 컬렉터들의 공분을 산 사이토의 발언에 침묵하던 그는 측근의 입을 빌어 미술품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지만, 사이토의 당시 발언은 지금도 컬렉터의 마음가짐에 반면교사로 작용하고 있다.

1993년 1억 엔 뇌물 공여 혐의로 체포돼 다이쇼와제지의 명예회장직까지 잃었고 이어 1995년 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여파 때문인지 1996년 3월 79세로 사망했다.


사망 1년 후 1997년 사이토 료에이가 애장했던 고흐와 르누아르의 그림은 해외에 매각됐다고 알려졌다. 자산을 처분당할 기업의 운명과 함께 명화도 주인이 바뀔 처지가 된 것이다.


결국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과 르누아르의 ‘물랑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는 각각 4400만 달러, 5000만 달러라는 헐값에 급히 매각된다. 고흐의 경우 원금 대비 절반, 르누아르는 3분의 2 정도의 낮은 가격이었다. 역설적으로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은 사이토의 기행과 망언 때문에 전 세계인이 다시 보고 싶어 하는 명화로 화제작의 하나로 그 인기가 오히려 치솟았다.


미술품 또한 여느 공산품이나 부동산처럼 법적으로 작품의 소유권을 갖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작품을 마음대로 훼손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특히나 명작의 반열에 오른 미술품은 세계의 문화유산이기에 소유와 동시에 특별히 관리하고 보존할 책임까지도 따르는 일이다.

아직까지 ‘가셰 박사의 초상’은 경매시장은 물론이고 진품 자체가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 아직도 많은 미술애호가들은 사이토의 유언대로 그림이 사이토와 함께 화장되어 한 줌의 재로 사라진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기도 한다.


가셰 박사의 모습이 세상에 다시 나타나길 기다리지만, 아마도 어딘가에서 다시는 이런 세상의 욕망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며 어딘가에 꼭꼭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몰지각한 이의 삐뚤어진 소유욕 때문에 예술이 입었던 상처를 치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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