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갈로, 카미유 클로델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by 호림

소설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건드려질 때마다

아픔을 느끼는 상처를 갖는 건

내 삶에 대한 조절 능력을

상실하는 거였다.

나는 내 상처를 건드리는 사람의

의도대로 반응하며

살고 싶진 않았다.

- 은희경 <새의 선물> 중에서


독신자들도 많고

결혼생활에 실패한 사람도 있다.

그래서인지 자녀나

결혼 유무에 대해

초면에 대뜸 묻는 것이

상처를 건드리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쓰이는 시대다.


상처는 갖가지 형태로

우리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다.

그 상처를 덧나게 하지 않게

조심하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아닐까.


여기 두 여인도

그렇게 깊은 상처를

온몸으로 견디며 살았다.

"내일은 꼭

병원에서 나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조각을 마음껏 할 수 있겠지"

끌로델은 잃어버린 사랑에 절규하고

몸부림쳤지만

정신병원 외에는

달리 자신을 반겨주는 곳이 없었다.

연인이었던 조각사의 거인 로댕은

상처가 없는 것처럼 건재했지만.


반 고흐는 정신병원에서도

병원의 배려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지만

클로델은 그렇지 못했다.

아마도 조각과 회화의

작업 공간이나

성격이 달라서였을 수도 있지만.


멕시코의 국민화가 디에고는

연인에서 남편이 되었지만

그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프리다 갈로,

철심으로 지탱한

상처투성이의 자화상이

그녀를 상징하듯

마음과 몸의 상처는 예술이 되었다.


사랑을 잃었던 두 여인,

한 명은

지독한 육체적 고통에 몸부림쳤고

또 한 명은

정신의 병이 깊었다.

모두가 연인에게 버림받았다.

그렇지만 예술을 붙들고

삶의 의미를 찾으려

절규하는 삶이었다.

에르바르트 뭉크의 <절규>가

저절로 떠오르는 삶이었기에

예술이 아니었으면

삶을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상처에서 승화된 예술은

그래서 거룩한지도 모른다.


주변에도

갈로와 끌로델은 있을 것이다.

상처를 품은 사람의 마음을

더 이상 아프게 하지는 말자.

모두가 예술가는 아니기에.


휘트니 휴스턴의 이 노래는

아마 두 여인이 버림받았지만

그 사랑을 생각하며 부르는

정서가 담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주의할 점은 제목만 보고

결혼식 축가로 쓰면

낭패라는 것이다.


가사의 일부를 음미한다.


If I should stay, I would only be in your way. So I'll go,

but I know I'll think of you every step of the way and I will aiways love you.

내가 만약 당신 곁에 머물면 당신 길을 막겠죠. 그래서 난 떠날 거예요.

하지만 난 알죠. 매 순간마다 당신을 생각하고 언제나 당신을 사랑할 것이라는 것을.


(238) Whitney Houston - I Will Always Love You (Official 4K Video)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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