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아에서 선구자로

by 호림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처럼 종교의 이야기를 다룬 성화, 귀족들의 초상화 같이 세세하게 인체를 묘사하고

기성의 질서를 어느 정도 수용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이들의 그림은 초기에 밑그림이나 스케치 같은 불완전한 묘사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방식으로 마음에 들어온 이미지를 빛의 미묘한 움직임까지 포착하며 그리고 또 그렸다.

마네, 모네, 르느와르, 세잔, 드가 이런 일군의 화가들은 서로 교유하며 아카데미의 일부 만이 아닌 대중들이 인정하는 그림을 생각하면서 비난을 감내하며 자신들의 화풍을 열어갔다.


작업실에서 그리는 그림 대신 바깥으로 화구들을 들고 가서 몇 시간이고 앉아서 빛의 흐름을 정확히 포착하려 애쓰며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마네가 맏형 격으로 일군의 유파를 개척하는 역할을 하며 기성 화단에 대항하며 '낙선전' 같은 기획도 했지만

모네가 인상파를 만개시켰다고 할 만하다.

영국의 미술비평가이자 큐레이터였던 로저 프라이(1866-1934)는 반 고흐, 폴 고갱, 조르주 쇠라, 폴 세잔,

이 네 명을 '후기 인상파'라는 용어로 묶었다. 프라이는 이후 "마네와 후기인상파"라는 전시회를 기획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태동해 미국의 구매력과 영국의 심미안을 거치며 인상파는 서양 주류 미술계를 지배하는 유파로 뻗어나간 것이다.


사진술의 발달은 화단에 정밀한 묘사만이 미술의 본질이 아님을 일깨웠을지도 모른다. 과거 미술에 대한 혁신적인 몸짓이 '인상파'라는 미술사의 독보적이고 큰 줄기를 만들었다.

그림을 독학하다시피 한 고흐는 동생 테오의 도움으로 본고장 파리로 가서 인상파 그림을 보고 자신의 그림에 풍부한 색채감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고흐의 영향이 에드바르트 뭉크에게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은

<절규>를 보면 알 수 있다.


고흐는 생전에 주목 받지 못한 예술 순교자 같은 화가였지만, 고흐의 그림을 주목한 화가가 있었다. 카미유 피사로는 "고흐는 미쳐버리거나(or) 다른 화가들을 앞지를 것이다"라는 말을 숱하게 했지만, 나중에 "반 고흐가 이 두 가지에 다 해당된다는 사실(and)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아마도 한 가지가 있었기에 다른 한 가지가 저절로 따라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마네를 비롯한 인상파들이 기성 화단의 질서에 대해 순응과 경쟁적 적응을 택한 대신 반골기질로 덤비는 꿈틀거림이 있었기에 인상파는 큰 흐름을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문제의식이 없었다면 아마도 입체파, 표현주의 같은 현대미술의 물줄기는 없었거나 아주 더디게 흘러서 생성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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