앒폰스 무하는 체코 출신의 화가로 독특한 화풍으로 화화사에 이름을 올렸다. 무하는 피카소나 마티스, 고흐 같은 화가들에 비하면 한국인에게 생소한 이름이지만 아르누보의 선두주자로 불리기도 한다.
체코의 국민화가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체고인의 사랑을 받는다. 주로 본고장 파리와 미국을 오가며 활동했지만 조국 체코의 독립을 위한 일에 앞장섰고 슬라브의 정서를 독특한 화풍으로 녹여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언젠가부터 국민타자와 국민가수가 있었다. 국민이라는 대표성을 가진 가진 존재는 하나의 상징어로 더 이상을 설명이 필요 없는 단어가 되었다. 한 국가의 보편적 사랑을 받는 이는 귀한 존재다. 한국화단에는 이중섭과 박수근이 언뜻 떠오른다. 한국 시골에 흔히 보는 황소와 빨래터도 이제는 도시화와 함께 아득한 정서로 느껴지기에 두 화가를 대체할 화가들의 이름도 떠오르지만 한국적인 정서를 오롯이 담아내고 사랑받는 작가는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예술가의 국적은 그 나라 고유의 정서를 대표하기도 하지만 하나의 참고사항으로 보면 좋을 듯하다. 인류 보편의 정서에 호소하는 예술은 결코 국적으로 영토를 나누기 쉽지 않다. 영어의 정확한 의미를 몰라도 한국을 포함한 세계의 팬들은 비틀즈와 마이클 잭슨에 환호했고, 한국어를 몰라도 한글 가사가 들어간 BTS에 열광했다.
언어가 없는 클래식은 메시지가 특정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세계 보편의 정서에 호소하는 힘이 있다. 은근하지만 깊고 도도히 흐르는 선율은 그래서 생명력이 강한지도 모른다. 독일인들은 바그너를 국민작곡가로 생각한다고 해도 독일 출신의 베토벤에게는 그런 말을 붙이지 않는다고 한다. 인류의 유산으로 남은 작곡가를 특정 국가의 자랑으로 독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도 있는 듯하다.
한국의 백남준은 글로벌 무대에서 활약했고 도포에 갓을 쓰고 한국의 정체성을 뽐내기도 했지만 결코 국수적인 시각으로 예술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체코 출신의 거장 드보르작은 미국이라는 신세계에서 자신의 클래식 세계를 깊고 넓게 만들었다. 뿌리는 소중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예술의 정신은 광활하다.
콩쿠르에서 수상한 한국인들의 낭보는 늘 자랑스럽다. 냉전의 기운이 동서를 갈라놓을 때 쇼팽의 선율로 콩쿠르에 도전한 미국의 청년 반 클라이번이 있었다. 또한, 1980년 당시로서는 베트남전으로 미국과 대치했던 공산국가로 그 존재감이 미미했던 저개발국 베트남의 당 타이 손이 쇼팽 콩쿠르에서 우뚝 선 것 또한 대단한 일이었다.
예술의 아름다움은 늘 국가와 국적을 넘어서고 있다. 무하가 그려낸 무수한 여인들의 눈동자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기독교도가 아니라고 해서 성서의 이야기에서 나온 <삼손과 데릴라>의 이 아름다운 아리아에 귀를 막을 이도 없을 것이다. 예술은 종교의 경계 또한 초월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