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은 비록 땅에 디뎌도

by 호림

예술가나 문인들은 때로 현실과 초연하게 저 높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도 차가운 현실에 발을 단단히 붙이고 자신의 길을 찾아간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대학에서 전공 교수로 안정된 밥벌이 기반을 마련한 후에 자신의 예술과 문학세계를 펼치기도 하지만 언뜻 예술과는 무관해 보이는 영역에서 자신의 발톱을 숨기고 살다가 내공을 폭발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화가 앙리 루소는 세관원으로 일하며 틈틈이 그리던 아마추어 화가에서 피카소가 인정하는 화가로 화단에 우뚝 선 경우입니다. 그것도 쉰 살을 넘기고.

20221030_150233.jpg

하버드와 옥스퍼드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엘리트로 한때 은행이란 안정된 직장에 취직해 일했던 이가 '황무지'의 시인이 되었습니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던 T.S. 엘리엇, 그의 문재를 금융업에 썩히는 것은 잔인한 일이라 여긴 이들이 있었습니다. 에즈라 파운드 같은 이들이 후원자를 적극 추천하고 등단을 권유해 세계문학사에 남은 이가 T. S. 엘리엇입니다. 후원자 명단에는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있었습니다.


엘리엇은 1948년 노벨문학상을 받지만, 시뿐만 아니라 소설, 희곡에도 기여해 뮤지컬 <캣츠>의 뿌리가 되는 이야기도 구성한 바 있습니다. 그의 시에는 동서를 넘나드는 사상이 난해하게 스며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늦가을에 이 지성파 시인의 난해하지 않은 경구들을 음미하며 발을 땅에 디딘 우리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현실에 단단히 발을 붙이되 그 너머의 것을 생각하는 일은 시인과 예술가의 몫으로만 남기지 말았으면 합니다.

20221102_105240.jpg


멀리 갈 위험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만이 사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능력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아는 것이 너무 많지만, 확신하는 것은 너무 적다.

인류는 지나치게 사실에 가까운 것을 감내할 수가 없다.

유머 역시 특정한 심각한 이야기를 말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사랑은 침묵이다. 사랑은 말하려는 욕구와 싸우는 것이다.

걱정은 창조의 하녀다.

유용한 일을 하고, 용감하게 말하고, 아름다운 것을 깊이 생각하라. 사람의 삶은 이것으로 족하다.

- T. S. 엘리엇

20221030_164909.jpg

이 아름다운 가을의 서정도 잔인하게 앗아갈 겨울이 곧 쳐들어오겠지만, 그 길목에 서서 유용한 일과 아름다운 것을 깊이 생각해봅니다. 시인의 마음으로.


가을 서정/최정란 시, 김성희 작곡/Sop. 이미경/Pf. 김민경 - YouTube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