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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림 Dec 19. 2023

천천히 그러나 끝까지

<전쟁과 평화> 같은 벽돌책을 들고 졸음을 참으며 읽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문고판으로 작게 만든 책의 다이제스트본도 있었지만 왠지 책은 묵직한 제본이 제격일 것 같은 기억이 있다.


지금은 책을 안 읽어도 온갖 흥미로운 영상물이 넘쳐난다. 그 많은 볼거리를 놓칠세라 배속을 올려 1.5배나 그 이상으하는 기능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가성비를 넘어 '시성비'라는 말도 나온다. 음식도 자극적인 맛을 찾고 만남도 금세 결론을 내고자 하는 경우가 많다. 그 옛날 어르신들이 편지로 설레는 마음을 전하고 소지품으로 파트너를 정하는 미팅을 교제의 수단으로 했던 시절은 이제 전설로 묻혔다. 스마트폰으로 수시로 연락하고 잠시라도 관계의 끈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 피로할 지경인 시대다.    


 80세의 노시인 나태주는 말한다. 자신은 10년 단위의 호흡으로 성취하며 살았다고 하며 뭔가를 끝까지 해내는 힘을 <GRIT>에서 다시 배웠다고 한다. 이제 여든이 되어 죽음을 생각하고 5년 단위로 성취 리듬을 줄여야겠다고 다.(중앙일보 12/16 참조) 


3분 내외의 호흡으로 끝나는 대중가요와 길면 4악장에 1시간 가까지 걸리는 클래식 음악의 호흡은 다르다. 모든 걸 압축해서 소비할 수는 없다. 클래식의 매력을 말하는 책에서도 말한다.


백무산 시인의 <고요에 헹구지 않으면>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시간을 고요에 헹구지 않으면 오늘을 반복할 뿐 내일의 다른 시간이 뜨지 않기에"라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

바쁜 현대인들의 일상에 클래식이 파고들 여지는 많아 보이진 않습니다. 무려 한 시간에 이르는 교향곡 4악장 전곡은 3분 내외로 한 곡 감상이 끝나는 대중음악과는 호흡이 다르니까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클래식은 바쁘고 쫓기는 마음을 추스르고 느리게 생각하는 역발상의 지혜를 가르쳐준 음악이기도 합니다.

    - <당신을 위한 클래식> 전영범 지음, p.7-9  


경험상 꾸준히 해내는 힘이 없으면 책을 쓰거나 악기를 연주하기는 어렵다. '시성비'는 결국 속도의 문제만이 아닌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이 아닐까.  


 BBC 프롬스 2023: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 김봄소리 Bomsori (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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