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와 친구들

by 호림

대중에게 알려진다는 것은 일종의 신화를 만드는 일이다. 아우라가 형성되고 신화화가 진행되며 본질은 온 데 간데 없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모처럼 무장해제한 몇몇 친구들의 만남은 속내를 털어놓기 좋았다.


손톱만큼의 숨 쉴 공기도 허용하지 않고 따라붙는 언론의 감시망에서 벗어나 안도하며 오랜 우정을 얘기한 친구는 이미 명성이라는 공기에 질식하고 있었다. 한 때 우쭐함을 즐기는 듯한 그래서 다소 거만했던 모습은 없었다. 어느새 연륜과 성숙이라는 단어와 가까이 가 있는 듯했다.


깔깔거림과 웅성거림에서 벗어나 내게 순서가 오자 예술사의 일단을 소개할 여유가 생겼다. 우리가 기억하는 파블로 피카소는 화가로서 유명세 면에서는 단연 우뚝하지만 그 시대에 우정을 나눈 친구들의 면모도 대단하다. 야수파의 대표 격인 앙리 마티스, 최후의 인상주의 화가로 불리기도 하는 피에르 보나르, 피카소와 같이 의기투합해 입체파의 문을 활짝 열었던 조르주 브라크가 있었다.

피카소의 사교계의 명사처럼 활개 치는 삶과 보나르의 따분한 은둔형 삶은 동시대와 후대의 명성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피카소보다 늘 의젓한 면모의 마티스는 보나르를 천재로 평가했는데, 이를 피카소가 질투하기도 했다.


피카소의 오랜 연인이었던 프랑스와즈 질로의 증언에 따르면 조르주 브라크는 언제나 한결같은 젠틀맨이었다. 50년 이상을 부인 마르셀 브라크과 같이 하며 한 눈 팔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림이 팔리고 부호의 반열에 올랐을 때 가끔 폭식을 즐기고 고급 자동차로 스피드를 즐기는 정도가 일탈의 전부일 정도다.

피카소는 전쟁과 이념의 소용돌이에서도 완장을 차는 일에 거침이 없었다. 스페인 국적이었지만 프랑스 공산주의 운동의 선봉에 서기도 한 열혈 청년이었기에 브라크에게도 어깨동무를 위해 공산당 가입울 요청했다. 끝내 거부한 브라크와 피카소의 오랜 우정은 한때 서먹해지도 했지만 그래도 관계가 단절될 정도는 아니었다.

마티스가 위대한 화가로 생각했지만 천재일 뿐이라고 피카소에 대해서 평가를 절하했던 건 두 사람의 애증의 깊이를 엿보게 한다. 아마도 예술을 떠나 그의 좌충우돌 사생활과 세계관도 마티스가 점수를 깎았던 요인일 것이다.


그래도 오늘날 명성의 크기는 피카소가 크지만 화단의 평가와 입체파에 공헌한 무게감은 브라크 또한 피카소에 뒤지지 않는다. 마티스와 보나르 또한 피카소의 명성과 위세에도 전혀 빛이 바래지 않을 명작을 남겼다.

아폴론적인 질서에서 일탈하지 않았던 신사도 있고 디오니소스적인 축제를 즐기면서 그 내면의 끼를 주체하지 못했던 예술가들도 많다. 보나르와 브라크를 지나 마크 로스코에 이르는 화가들을 전자에 묶고 고흐와 클림트, 모딜리아니는 후자에 포함시킬 수도 것이다.


끊임없는 화제와 스캔들이 따라다닌 피카소에게는 저마다 다른 색깔의 대단한 친구들이 있어서 그 예술세계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앙드레 말로가 말했던가. 프랑스에는 결국 샤넬과 드골, 그리고 피카소만 남는다고. 나폴레옹이 빠지고 스페인에서 온 이방인을 끼워 넣었다고 의아해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피카소는 피카소다.


(38) Renée Fleming, Franz Schubert - Nacht und Träume,2005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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