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때문이었다고 고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대로 가면 회사가 망할 것 같아서 불안하다고 생각했는 데, 사실은 남들에게 뒤처지는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아무 대안 없이 직장을 그만둬버릴 나 자신이 불안했다.
- 내 커리어는 왜 그렇게 매번 성공적이어야 했는가 하면, 시장에서 나를 증명하여 다른 곳으로 더 잘 팔릴 여지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더 역동적인 곳, 더 이름난 곳, 더 큰 곳으로 이직하려는 이유는, 내가 매사 진취적인 사람이어서라기보다는 잘 먹히고 팔릴 수 있는 타이틀을 쥐고 싶기 때문이었다.
- 왜 그렇게 나를 잘 팔리게 하는 전략을 유지해야 했는가 하면, 월급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불안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게 다는 아니다.
먹기 위해 산다, 이런 자조적 표현은 요즘 사람들이 잘 선택 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런데 유독 회사생활을 이야기할 때 만큼은, 상처입은 날들의 끄트머리에 서서 그나마 결국 돈뿐이었다고 자조한다. 이럴 때는 그냥 그동안 녹록치 않았구나 하고 서로를 위로하면 될 일이다.
회사가 아니라 사회라고 읽어본다. 내가 속한 작은 사회, 그러나 확실하고 견고한 사회. 이 안에 오로지 ‘돈만’ 벌기 위 해 사는 내가 아니라, 다채로운 하루를 보내며 ‘돈도’ 버는 내가 있다. 물론 거대한 시스템에 묶여 있다는 걸 안다. 그게 가끔 화나게 한다. 결코 반항적인 개인성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는 복잡한 내가 있다. 이 과정에서 나 자신의 속물적 민낯을 보았고, 나약한 모습을 마주하고 또 실망했다. 이상적인 가치를 기대하면 매번 어긋나 좌절 했고, 어떤 때는 옳거나 틀렸다는 게 뭔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혼란과 모순에 어지러운 가운데, 나는 그저 어떤 게 내면의 진실에 가까운지 여러 날 검토해보는 것 말고는 특별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회사를 다니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면서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게 어차피 나를 들여다보는 것 말고는 또 뭐가 있을까 싶다. 어떤 세상에 발 딛고 서 있든, 나 스스로 온전히 바로 서고자 하는 일, 어딘가에 기대어 부표처럼 둥둥 떠다니기보다는 나의 두 발로 걸어가고자 하는 일. 그것 말고 무엇을 더 할 게 있는가 싶다.
그래서 요새는 눈을 똘망똘망 뜨고 말한다. 회사에 계속 다니고 있어. 천편일률적인 삶이지. 그래, 나는 매사에 불안하고 별 대안이 없어. 그때그때의 불안을 끌어안거나 다스리기 위해, 비비고 싶지 않은 순간에 비비고, 굽혀야 할 것 같은 순간에 굽히지 않아. 일관성이 없지만 하루를 제대로 살아. 그게 왜? 별것 아닌 것 같아? 그게 뭐 어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