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능소화

유통기한이 지워진 사랑

by Matricaria


Chapter 1

여름 하면 떠오르는 풀피리 만들기 딱 좋은 나뭇잎이 흔들리고 있다. 쪄 죽을 것 같은 때에 잘 익은 나뭇잎들이 살랑거리면 더울 틈도 없이 뜨거운 바람이 하나의 영양분이 되어 몸속에 들어오는 것 같다.


정말 시원하네 정말 더운데 말이야.

그 길에 네가 있어 더욱 시원한 여름인 것 같다.


맑은 미소 하나에 내 평생의 여름이 스쳐 지나가고 흔들리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시원한 파도를 닮아 보는 내내 아름다운 여름을 만끽하는 것 같다. ​


네가 뜬금없이 잘 익은 햇살을 바라보곤

나에게 밝게 웃으며 말을 한다.

“널 만날 때마다 항상 날씨가 좋아.

혹시 날씨의 요정?!”

예전 같았으면 어딘가 확실하게 쪼그라듦을 견디지 못해서 주먹이 먼저 나갔을 테다. 그렇지만 푹푹 찌는 한여름이 밉지만은 않아서, 잘 익은 햇살이 기분 좋은 만큼 쨍쨍해서라고 핑계를 대고 뻔뻔하리만큼 대답했다.

“음, 원래 빼는데 이건 못 참지.

마음 다해, 감사합니다??”

그런 나의 반응이 웃기다는 듯 옆에서 잘 걷던 네가 걸음을 멈추고 깔깔댄다. 자신보다 걸음이 느린 나를 위해 가끔 뒤에서 걷다가 이야기를 꺼낼 때면 발을 먼저, 그리고 눈도 같이 맞춰주는 모습이다. 뜨거운 여름날의 따뜻한 배려로 다가와버려 한껏 신나버린 나머지, 이번엔 내가 접어둔 농담을 슬며시 펴봤다.

“저기 저 건물 보이지? 저기에 연예인들이 많이 산대. 집값이 앞으로도 엄청 오를 거야 아마.

그니까 사줘.”

이전에도 비슷한 장난들을 치긴 했지만 이번이 가장 빌드업이 잘 되었다며 연신 웃는 너였다.

“30년만 기다려!”

어처구니가 없어서 네가 남긴 웃음소리들을 내가 대신 주워 담고 또다시 푹푹 찌는 여름의 서울을 나돈다.

​​​

​​​“저기 능소화다! 능소화는 어디에서나 예쁘네.”


“넌 참 꽃 이름을 잘 안다. 나도 잘 모르는데.”


흔하디흔한 말인데도 네가 하는 말이어서 그런지, 내가 능소화를 알고 있음에 특별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말 하나에 진심이 이토록이나 고마웠던 것인지 새삼 느끼는 것 같다. 그리고 곧 그에게 고마움을 무한대로 표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Chapter 2

“아, 빨리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이태원의 술집에 데려갔더니 그가 하는 말이다. 눈앞에 이태리 음식을 놓고 한식을 찾는 격으로 말을 하길래 그 모습이 웃겨서 연신 깔깔댄 기억이 있다.


시리게 한발 내디디면 땅을 머금은 소리가 나는 겨울을 우리 둘 다 그리워 하지만,

올해의 녹음은 평생의 겨울을 이길 수 있을까?

만약 누군가 나에게 물어본다면

아마 겨울이 그립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아직도 이질감이 느껴지는 선이 있지만, 서로의 선을 배려해 가며 지난날의 수고를 토닥여주는 시간을 가졌다. ‘대단해, 최고야, 너이기에 해낸 거야‘와 같은 말들은 끊이질 않았고 잔잔한 한강 수면 위로 그 이야기들은 하나씩 떠올랐다.


정말 즐거운 여름이었어.

물론 그렇고말고.​

​​​​


Chapter 3

“너와 재밌게 돌아다닌 이후로 만보를 채워!”

건강한 생활을 하고 있다. 손에 잡히지 않던 일도 찾아서 하게 되고, 몸에 좋은 습관을 들이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지 않는다.

여름엔 역시 싱그러운 토마토가 제격이지. 오늘은 토마토 잼을 만들어볼까. 만들어서 선물해 줄까.

다음을 기약하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좋은 옷, 음식, 공연들을 접하면 네가 생각나는 어처구니없는 오지랖이 생긴다.

생각으로 한껏 꾸민 선물을 손에 쥐고 있다가도 푹 내려놓고 멍 때리게 되지만

다시금 여름을 닮은 너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져서 들뜬 나를 마주할 수 있다.

Chapter 4

“너랑 있으면 시간이 너무 빨리 가. 너를 만나지 말아야겠어. “

”너 그 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

”아니요. “

왜인지 모르게 여름밤의 향이 물씬 나는 대화들이 오간다. 풀잎 향처럼 간지러운 것 같으면서도 시원하고 부드러운 것이 능청스러운 너를 닮아서일까,

하루가 모자라도록 대화가 오가는데도 여전히 하고픈 말이 많았다.

”나는 네가 너무 대단하다고 생각해. 그 모든 일들을 겪고도 일어났고, 결국엔 해냈잖아. 너 정말 대단해. “

”내가 더 그렇게 생각해. 너 얼마나 대단한데. “

눈을 마주쳐가며 하는 대화치고는 어딘가 심히 간지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꼭 목소리로 하고픈 말들이었다. 그런 그를 존경했고, 그래서 더욱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누군가는 이 순간에 부정맥을 느낄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저 평온함이 주변을 맴돌아서 눈에 아른거리는 단어들을 나열할 때마다 안온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나 행복하고 편해도 되는 걸까? 별생각 없는 여름이었는데, 짧은 여름밤의 깊이는 점점 더 깊어져만 간다. 이젠 아무렴, 상관이 없다. 이대로 기억에 남아도 충분히 넘쳤고 은은하게 맑은 미소를 계속 볼 수 있다면 그것대로 감사한 마음뿐이다.

그저 둘 다, 내겐 귀인이다.

그의 여름 또한 그저 덥지만은 않았길 바라며.

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