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스나잇

유통기한이 지워진 사랑

by Matricaria


“너는 너의 심지를 찾는 게 우선일 것 같아.”

눈앞에 놓인 짜고 자극적인 감자칩이 모두 가루가 되었을 즈음 그녀가 내게 한 말이다. 우리는 하루 동안의 시간을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웃음으로 보냈고 누구 하나가 지칠 때쯤 서로를 위한 배려로 부담스러운 웃음을 짓곤 했다. 늦은 밤은 한 여름의 풋풋함과 싱그러움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밝았고 입과 입을 통해 서로에게 전해지는 감정들은 귓가를 적당히 간지럽힐 정도로만 성숙했다.

“우리 이제 너의 이야기를 해보자.”

“나? 내가 할 이야기가 있나? 이 좋은 밤을 난 망치기 싫어.”

“이 좋은 밤에 할 수 없는 이야기는 세상에 없어.

그리고 나는 네가 제발 너의 짐을 나에게, 혹은 타인에게 털어놨으면 좋겠어.”

완고한 눈빛으로 나를 당장이라고 껴안겠다며 그 어느 때보다도 당돌한 그녀는 나를 계속해서 설득시켰다. 밤이 문제였는지 저녁에 마신 망고 하이볼이 문제였는지 도통 모르겠지만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 번뜩 들어 현대미술 마냥 진실을 빙빙 돌리던 나의 모든 감각을 되잡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읽히지 않게 행동했던 내가 타인에게 밑천을 술술 불고 있다는 사실이 영 탐탁지는 않았지만 되레 밑천이 드러날수록 동경했던 파도가 되었다가, 손에서 흐르는 알루미늄이 되고, 어떤 때는 빵빵 터지는 팝콘기계인 줄 알았는데 그저 보글거리는 거품이었던 경험을 했다. 행위예술이 이어지는 내내 그녀는 나를 어느 때보다도 진중히 차분하게 대했다. 심각하게 경직된 내용들이 지나고 점점 웃음이 번질 때 즈음 그녀는 그제야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겠네. 전혀 가벼운 고민도 아니고 복합적인게 참 어렵다. 하지만 너에게 굳은 심지가 필요할 것 같아.

여하튼 대단한 건 정말 대단한 거고.

참…너 정말 대단하다.”

“그렇지 않아. 되레 나는 안일함과 책임감으로 인해 미성숙해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

“맞아. 원래 하나만 파고 열중인 사람들은 미숙해. 그럴 수밖에 없어.”

“맞지. 이렇게까지나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도, 위로받은 적도 없었는데 참 고맙다 너에게.”

“전혀 아니야. 언제든지 털어놔. 네가 대상포진이 괜히 온게 아니야. 너 그러다 정말 암걸려 제발 털어놔.”

기쁠 때 기뻐하지 못하고 슬플 때는 한없이 슬픈 스스로를 보며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어이없는 생각들을 인생의 엔딩으로 가결시켜버린 나의 지난날이 스쳐 지나갔다. 내 눈앞에 있는 이는 저렇게나도 강인한데 나는 왜 이렇게나 필요하지 않은 짐들을 이고 사는 걸까 싶어서 괜히 가루가 된 감자칩을 손끝에 쓱- 찍어봤다.

“그리고 너에겐 단호함이 필요해.

네가 살아온 전적들을 감히 평가할 순 없지만 내가 본 너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참 정석대로, 잘 살아온 것 같아. 정말 잘했어! 하지만 이제는 좀 단호해질 필요가 있어.”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단어만 다르지 그 내용은 내 은사님들께서 해주신 것이었는데 이렇게나 쉽게 알아들어도 될까? 참 복받았다 싶은 생각에 괜히 눈물이 고였다. 행위 예술을 하면서도 나는 왜 기쁠 때 마음껏 좋아하지 못했을까, 슬플 때 슬픔을 털어놓지 않았을까. 삶을 삶대로 잘 살지 못한 것 같아 울음을 몰래 먹었는데 단호하라는 그 한마디에 식도를 타고 지났는 줄만 알았던 응어리가 되돌아왔다.

“고마워. 이런 성숙한 네가 지금 곁에 있어서 너무 좋다.”

“아니야. 생각해 보니 그럼 너는 그 상황에서 시한폭탄이 도대체 몇 개였던 거야! 네가 힘들어 보이긴 했는데 들어보니 역시 맞았고, 참 어려웠겠다 싶어.”

“하하…그래서 요즘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답은 그 누구도 대답해 줄 수 없는 거잖아. 이를테면 네가 말한 심지를 세우는 것부터 말이야. 그건 정말 어려운 것 같아.”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너는 왜인지 책에만 또 매달릴 것 같아. 제발 나돌아다녀. 아무나 만나서 영감을 얻고, 즐겁게 웃다가도 슬쩍 물어봐. 그럼 정말 돌아오는 길에 너의 새로운 인생이 생겨버릴지도 몰라. 그런 의미에서, 네가 미뤘던 관계들부터 붙잡아봐.”

“그러네. 나 한 번도 내가 해보고 싶은 대로 한 적이 없어. 즐겁다가도 할 일들이 생각나서 마음을 접고 다 잘 하고 싶은 마음에 소중한 사람들의 손을 놓고, 관계에 지쳐서 상처받지 않으려고 ‘적당히’라는 선에 아주 잘 맞추려 노력하며 들어주기만 했지. 그러네. 그러네…”

“너에겐 너를 잡아줄 사람이 필요해.”

“내 눈앞에 네가 있는데도?”

“응. 그니까 아까 다 하지 못한 그 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심연에 빠져 진실을 착각하고 내가 나를 학대할 뻔한 일들을 막아준 이가 있었다. 별말을 하지 않아도 즐거웠고 내가 가끔 내뱉는 싱거운 농담에 배가 빠지도록 웃어줬다. 나를 나로서 여겨주며 세상에서 가장 적당한 말들을 적당한 때에 읊어줬다. 매 순간 열심을 다하고 싶었던 마음은 서로 같았기에 나는 그를 존경했고, 그도 사실 진심은 모르겠지만, 내가 장하다는 듯 수많은 힘들을 불어넣어 줬다.

하루는 그가 말했다.

“너는 거절을 못 할 것 같아. 그렇지?”

“맞아. 네가 보이기에도 내가 그래 보이나 보네?”

“응. 그런데 그렇게 살면 정말 힘들어. 네가 말하길, 사람들의 시선으로 인해 널 위해 하고자 한 선택을 물렀다고 했지? 그러지 않아도 돼. 노래 부르고 싶으면 노래 부르고, 춤추고 싶으면 춤춰. 그게 길이어도 되고 식당이어도 상관없어. 그냥 오늘 한번 보고 말 사람들이잖아 그치? 오랫동안 볼 사람들이어도 그래. 정말 너만 힘들어.”

그런 강한 심지가 있는 말을 하는 네가 내 친구고 그 반대인 내가 너의 친구임에 부끄러워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어떤 표정을 하고 말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 말들이 너무 따뜻하고 진심으로 걱정하며 위로해 주는 것 같아서 그 말을 들었을 때, 한참 동안이나 멍을 때리고, 또 때렸다. 그런 네가 참 따뜻한 사람이어서, 참 좋은 친구여서, 모든 감정을 말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어서 세상에 고맙고, 내 삶에게 고맙고, 휘황찬란한 수식어 필요 없이 그저 눈물 나게 감동이었다. 그리고 그날의 끝은 잔잔한 웃음으로 마무리가 되었던 것 같다.

이 모든 일들이 잊히지 않아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너와 같은 말을 하고, 너와 같게 나를 위해주는 사람이 또 있다는 게 신기하다며 내가 겪은 소중한 경험을 그녀에게 전해줬다.

그녀는 말없이 듣더니, 귀인이라며 꼭 지켰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금의 너에게 중요한 건 나와 같은 그 친구와, 그리고 네가 소중하게 여기는 소수의 사람들인 것 같아. 너나, 그 친구 모두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참 귀인이네.”

그런 말을 하는 너는 너 스스로가 귀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걸까, 나에게는 너무나 과분한 밤이 그 어느 때보다도 느릿느릿하고 진중하게 흐름을 점점 줄어드는 맥주의 양을 보며, 점점 짙어지는 밤하늘의 색을 보며, 배경으로 틀어둔 ~ 플레이리스트가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을 보며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너의 모든 이야기들을 듣고 나니,

정말 인간관계는 별게 아니네, 참…관계보다도 더 큰일들이 만연하다. 그럼에도 굳이 내가 한마디 하자면, 너에게 걔가 귀인이네.”

술도 마시지 않았으면서 괜히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날 위하면서도 내가 겪은 일들이 믿기지 않지만 당장은 위로를 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그런 것 같은 표정을 닮았길래 고마우면서도 미안하고 귀여웠다.

그와의 대화가 끝나고 하고 싶었던 것들을 천천히 떠올려봤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 누구의 간섭도 없이 그저 나를 나로서. 한강 앞에서 밤을 새워보고 싶고, 하루 종일 책을 읽어보고 싶고, 시간이 흘러 정리가 되어버린 이들의 손을 놓아보고 싶고, 되레 시간이 흘렀지만 보고 싶은 이들에게 염치없지만 오랜만에 연락하고 싶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당돌하게 좋아한다 해보고 싶고, 싫어하는 사람이 요구하는 관계를 단호하게 거절해 보고 싶은 게 내 마음이었다. 그럼 나는 그것들을 해보고자 한다면, 그럼 행복했고, 그럼 즐겁고, 그럼 내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이 깨달음이 지금 이 순간에 찾아온 거지? 깨달음이라며 잊어버린 것들이 참 만연한데, 깨달음이라기보다 이 감정들이 너무 소중해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입 밖으로 꺼내 마음에서 모두 새어나가버리기 전에 글로서 남기기로 했다.

그리곤 대화의 끝을 나직이 떠올려봤다.

아, 오늘 밤 참 낭만적이네.

그치. 맞아. 나도 너무 좋다.

네가 잘 됐으면 좋겠어. 나는 하고 싶은 말 다 했다!

이젠 네 몫이야.

그래 맞아 이젠 내 몫이야.​

고마워, 오늘을 잊지 못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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