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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딜리버 리 Feb 06. 2024

엄마를 못만날 수도 있었네

2024년 2월 6일(화, 흐리고 적당히 춥다)


집-(부산역)-(지게골역)-(경성대역)-용호동 W아파트-(학교 주차장)-커피 스페이스바(진한 아메리카노)-(아파트 주차장)-집


곧 설날이라 엄마 뵙고 용돈 드리고, 떡만둣국 먹으며,


-내가 불안하고 걱정되고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있었을 텐데, 학생운동할 때 아버지는 난리도 아니었는데, 엄마는 젤 앞에 나서지 말라고만 했잖아. 하지 말라 소리는 안 하고

-니가 하지 말란다고 안 할 것도 아닌데, 해서 머하노?

-근데 어릴 때도 하지 말란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어

-내가 그랬나? 몰라


TV에서 국회의원 공천 관련 뉴스가 나온다

-엄마는 어릴 때 뭐가 되고 싶었어?

-그런 거 없었는데

-내 기억에 외가가 제법 살았는데…

-니가 그걸 우째 아노?

-외가 본채가 번듯한 기와집이고 마당 가로질러 사랑채 있고, 입구는 솟을대문에 테레비 있었잖아. 동네 사람들 저녁에 테레비 보러오고

-그걸 기억하나?

-예전에 이모님이 내 마음에 안드는 사람 있다고 대문 걸어잠가서 테레비 보러 온 동네사람들한테 민망했다고 그러던데 ㅎㅎ

-너거 외할버지가 수완이 좋았는지, 일본서 돈 벌어와서 논도 사고 양조장 했지

-근데 엄마는 왜 국민학교만 졸업했어?

-진주사범대 병설중학교 가려고 했지. 같이 놀던 동네 친구 셋이 있는데, 갸들은 국민학교도 못 갔어. 여자가 중학교 가는 건 드물 때지.

-그래?

-거기 나왔으면 오빠(큰외삼촌)처럼 학교 선생했지 않았을까?

-근데?

-국민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손도 못쓰고 갑자기 돌아가셨어. 구수아재(막내 외삼촌)가 백일인가 그럴 땐데 엄마가 그 와중에 정신줄을 놓고 자식들을 못 챙겼어. 무슨 일만 있으마 아버지 무덤 가서 울고, 아버지 재산을 챙기려는 친척들이 달라붙는데

-아~

-오빠는 진주서 학교 다니제, 둘(이모들)이는 내보다 어리제, 엄마는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정신이 없제, 구수는 어리니까 우는기 일이제, 내가 맏이니까 살림을 살아야지, 우짜겠노?


-어, 그랬구나. 처음 듣네. 근데 아버지는 고등학교 중퇴인데도 학력 콤플렉스가 심했잖아. 우리한테 공부 하라고 맨날 머라카고, 매를 들었잖아. 엄마는 그런 콤플렉스가 없는 것 같아서, 공부, 공부 다그치지도 않고.

-공부하라고 쪼은다고 공부할 거 같으면 세상에 공부 안 할 사람이 어딨노? 지가 하고 싶어야 하는 기지. 공부 머리도 타고나야 하고.

-그럼 이후라도 중학교 가지 그랬어?

-엄마가 안하니 내라도 구수 업어서 키우면서 살림 살아야지. 농사가 많아서 일꾼들 밥 해대는 것도 버거운데 다른 생각 할 틈이 있나? 창희(큰 이모)도 국민학교 졸업하고 2년인가 있다가 중학교 갔어

-엄마, 선생 됐으마 아버지랑 결혼 안 했을 거고, 나랑 못 만날 수도 있었겠다

-그렇지(빈말로나마 아니라고 안 하는 쿨한 양반!)

-흐흐흐, 내 입장에선 엄마 중학교 못 간 게 다행이네

-나는 학교는 못 가도 책 읽는 게 좋았어. 오빠가 보던 책을 다 가져와서 읽었지. 괴도 루팡 읽었던 기억나. 책을 읽으마 그 부분이 연상되잖아. 거기 그래 좋대.

-어릴 때 아버지는 공부하라고 맨날 머라카는데 책 읽는 걸 못 봤는데, 엄마가 틈나는 대로 책 읽는 모습은 생생해. 친구집 가면 다른 엄마들은 안 그래서 신기했어.

-요새도 신문은 다 읽는데, 글자가 작아서 영 불편해


-어? 요 얼마 전에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책을 도서관에서 빌리는데 큰 글자 책이더라. 나도 작은 글씨 보는 게 불편했는데, 글자가 커서 편하더라.

-그런기 있어?

-응. 다음에 내가 그 책 사 올게. 빨치산 출신 아버지가 죽은 뒤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얽히고설킨 친인척과 동네 사람들과의 관계를 딸이 소설로 쓴 건데, 술술 읽혀

-빨치산의 딸인가 뭐 그거 쓴 사람 아이가?

-엄마가 우째 알아?

-테레비에서 책 소개하며 나오는 거 봤다. 그래서 저거 아버지는 죽어서야 해방됐다는 긴가?

-으음… 아버지가 염원했던 사회주의 세상에 대한 생각에서 해방됐다는 건지, 한동네에 좌우익이 공존하며 겪은 갈등에서 해방됐을 수도, 옛날에 연좌제 있었잖아. 당연히 가족 간에 원망이 있었을 테고, 결국 죽어서야 현실의 굴레에서 풀려났다는 건지, 해석은 읽은 사람마다 다르겠지.

-하기사 그때는 같은 동네에서 원수가 되고 그랬지

-엄마 동네도 그랬어?

-625 터졌을 때 어려서 잘 모르겠는데, 커서 보이 같은 동네 사람인데 원수로 지내는 사람들 있었어

-서로 힘들었겠다

-죽이네 마네 하면서도 같이 술 먹고 싸우고, 그걸 맨날 하더라

-그기 머꼬?

-사는 기 그렇다. 딱 끊고 싶어도 끊어지지 않는기 인연이고 마음이지. 끊고 싶다고 끊을 수 있으마 세상 고민할 끼 어딨겠노?


그러게,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끊어질 줄 알았는데, 몸의 기억이 있는 한 안 끊어질 것이다. 엄마 어떡해야 해? 묻고 싶은데 걱정거리만 또 하나 안겨드릴 것 같아 입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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