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줄어들어도 어쩔 수가 없다

by 딜리버 리

예전에 서울 갔다 온 사촌동생이 자기 집에 가기 전에 우리 집에 며칠 머물렀다. 연탄보일러에 올린 양동이에서 뜨거운 물을 떠서 찬물과 섞어 세수물을 줬더니 말끝을 올리는 서울말을 흉내 내며 ”뜨신 물이니?", 고작 3일 머물고 와놓고.


무려 한 달 동안 서울 출장 갔다 오니 평소 다녔던 배송구역이 낯설다. 택배와 여행은 낯섦에 대한 빠른 인정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비슷하지 싶다. '여긴 왜 이래~‘, 햐아~ 씨바' 불평해 봐야 조건은 그대로다. 나를 낯선 환경에 빠르게 적응시켜야 택배도 여행도 본격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 보이는 계단을 올라서면 더 가파른 계단이 있는 걸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에잇~ 아는 게 힘이라고? 모르는 게 약이다.


계단 끝집 배송 끝내고 가쁜 숨을 돌리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서울에서 왔나?

-네, 안 그래도 전화드릴라 했는데

-바쁜데 머 하려고… 몸은?

-괜찮아요. 많이 더운데 엄마는요?

-나야 집에 있는데 뭐… 더버서 우짜노? 택배 하기 힘들낀데

-견딜만해요. 내일 휴무일인데... 찾아뵐게요


어제 삼계탕을 4 봉지 샀는데 솥이 작아 3 봉지만 들어가서 남겼는데, 먹을 복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며 삼계탕을 내주신다.

-여긴 층수가 높고 바닷가 옆이라 그런지 시원하네

-바람 불어서 그렇지. 어제처럼 바람 한 점 없으면 완전 찜통이라

-바닷간데 바람이 안 불기도 하는구나

-오늘 아침에 비행기가 여러대… 그거 부르는 이름이 있는데…

-(무슨 행사 소식을 본 것 같아) 항공쇼?

-블랙이글! 갸들이 연습하니까 놀라지 말라고 문자 왔대. 비행기 여러 대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는데, 멋지더라

-그걸 여기서 해?

-연습이라대. 처음엔 그냥 구경하다가 사진 찍었는데… 어디 있을낀데

엄마가 찍은 항공쇼 연습 사진을 보다가 지난번 후쿠오카 여행도 그렇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종종 찍는 게 기억나서,

-엄마, 사진 찍는 거 좋아하시네

-오늘뿐이잖아

-응?

창밖 풍경을 찍어서 복지관에서 일하는 동료에게 보여줬더니 언니는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인데, 맨날 같은 모습인데 왜 찍냐고 얘기해서 우리한텐 마지막 오늘일지도 모르잖아 대답했단다. 엄마, 오늘을 오래오래 찍어요.


뚜뚜뚜, 뚜뚜뚜

-어~(목소리가 착 가라앉고 잠겼다)

-어데 아파요?

-아이다. 누버 있어서 그렇다

-병원은 갔다 왔고?

-물 빼고, 연골주사 맞고 그랬지

-또 물이 찼어? 일주일 전엔 물 빼서 주사 못 놓는다 했잖아

-그래서 물었더니 물 마르는 약을 처방해서 괜찮대

-그리 처방하면 되는데 일주일새 말이 다르노… 몸은 괜찮아?

-나아진 것 같기도, 익숙해진 것 같기도… 어지 아레 쉬더니 (주로 휴무일 연락하는데) 어디 아프나?

-아입니다. 주 5일 근문데 무작위로 휴무가 잡히니까

-그럼 됐고…

-엄마, 영화 보러 가까? 영화 좋아하잖아

-좋아하지. (한참 뜸을 들이시더니) 집에 있을란다. 니라도 가라.

-왜? 기분 처져도 사부작사부작 댕기야 활기 돌고, 그래야 기분 나아지는데…

-병원 댕기니까 낫겠지… 나아지면 다니자

-(조르면 불편하실 것 같아) 그래요. 엄마?

-응

-아침, 저녁으로 산책 다니고, 시장 가고 그래요

-그래. 들어가라

전화를 끊나 싶은데

-(망설임과 안타까움이 겹쳐진 목소리로) 초량엔 전화해 봤나?

-아니요. 뭔 일 있어요?

-아이다. 그쪽도 나이가 있는데 휴무일에 전화해 봐라

-엄마, 초량은 신경 쓰지 않기로… 엄마 몸도 안 좋으면서…

-나야 그쪽이랑 끝나도 니는 어쩔 수 없다 아이가…

-엄마~ 이제 더이상 신경 쓰지 마요. 어쩔 수 없는 관계인 거 아니까...

-그래, 알겠다. 밥 잘 챙기먹고 운전 조심하고

-네. 빨리 나아요.

몸이 안 좋아지고 있는 걸 느끼실 텐데… 본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싶은지 한사코 엮이지 않으려는 50대 아들이 걱정돼서인지 한동안 안 꺼낸 어쩔 수 없는 관계를 얘기하신다. ”암만 그래도 천륜인데… 우짜겠노?“


극장, 미술관, 박물관이나 여행 얘기를 꺼내며 “엄마, 000 가까?” 물으면 처음엔 빼시다가 빙그레 웃으며 "재밌겠네", "그럴까?" 하며 옷을 챙겨 입던 양반이 올해 봄에 소화기관이 약해져서 수술받은 후로 집 밖으로 나다니는 걸 꺼리시더니, 얼마 전 무릎이 안 좋아진 후론 버스로 10분이면 가는 극장인데도 사양하신다. “늙어서 안아픈기 이상한 거라”는 엄마 말이 아니어도, 엄마의 몸이 마음을 바꾸고 있는데 같이 있을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세상 모든 사물이 끝이 있으니 인연도 끝이 있는 걸 알지만, 알고 있어도 어쩔 수 없다. 상상하지 않은(하기 싫은) 상실과 부재가 현실이 되었을 때 아픔과 슬픔이 어떤 지 이미 겪었기에, 알기에, 불안은 더 커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딸기잼과 포도잼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