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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딜리버 리 Dec 31. 2023

미안하고 고마워

채팅창 상단에 고정된 채 더 이상 아무 반응이 없는 "미안하고 고마워", 이 짧은 문장을 수백 번 다시 보고, 어떤 의미를 담았을까 읽고 또 읽는다. 미안함과 고마움의 표현이 아무리 서툴러도 지난 20여 년의 시간을 이렇게 짧게 정리하다니, 너무 짧아서 놀랬고 슬펐다.


내가 자기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진심으로 얘기했다고 느꼈으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안다면서, 축약 잘못하고 오히려 편한 글쓰기를 잘하면서 예의로나마 몇 마디라도 덧붙여주지, 이렇게 짧게 끝냈을까? 그렇게 나를 지우고 싶었을까?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새로운 만남을 위해, 그렇게까지 나를 몰아붙이고, 물고 뜯고, 욕을 퍼붓고, 궁지에 몰고 모욕을 주고, 과거의 잘못을 반복해서 끄집어내어 더한 잘못을 덧씌우고, 그래놓고 아무 일 아닌 듯 다른 사람을 만나고, 미래를 꿈꿨을 것이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미안함은커녕 내일이면 또 다른 나의 과거의 잘못을 찾아낼 것이고, 당장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이 아닌 말과 그 순간을 벗어나기 위한 거짓말이 반복될수록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모습이, 두려웠다.


그는 모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고(그게 뭐든 모르면 물었고 그걸 설명할 수 있을 때 기뻤다),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거짓말과 되는대로 말들을 지어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아는 척하고, 정확하게 짚어낼 순 없지만 어딘지 모르게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스스로 무너져가는 걸 모른 채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파며, 그걸 알지 못하는 모습에, 뭘 위해 저렇게까지 무너지는 걸까? 뭘 지키려고 저렇게 하는 걸까? 그래서 더 실망하고 상처받고, 안타까웠다.


관계가 끊어지고 마음이 아프고 슬픔이 계속되면 그 관계에 진심을 다해서 그렇단다. 진심을 다했고, 그 진심을 알아주는 것 같아 행복했지만 세상에 영원한 건 없듯이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괜찮지 않은 시간을 괜찮게 보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지 알게 되었고, 여전히 알아가는 중이다.


내가 아팠을 때 보인 태도, 매번 말로만 그쳤던 이후의 계획 등 분명 상처받은 일들이 있지만 담아두는 편이 아니다. 지금도 그와 즐겁고 행복했던 추억이 먼저 떠오른다. 그의 배신 역시 이미 지난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았다. 서로의 장단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20여 년 된 친구로 지내기로 했지만 그는 친구와 약속을 너무나 쉽게 저버렸고, 친구와 떠나기로 했던 기간에 대수롭지 않게 다른 여행을 가고, 친구의 상실감을 위로한다면서 어떤 배려도 없었다.


나는 서로의 속내를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고, 아픔과 슬픔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친구이길, 그는 어쩌다 한번 보는 사이 정도로 치부했다. 결국 어쩌다 한 번씩 만나는 언제든 버려질 대체품 같이 함부로 대하는 태도가 반복되었고, 울컥해서 그 점을 하소연하면 그는 내가 과거 일을 떠올리며 감정이 격앙되는 일이 반복돼서 힘들다 했다. 결국, 이번에도 저번처럼 먼저 사과했다. 반복되는 그의 현재(의 탈을 쓴 과거)가 두려웠지만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그래도 그를 볼 수 있으니까.


살아온 삶과 쌓아온 감정이 나이 들수록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고 한다. 어느 순간부터 나이 대비 최강 동안 미모와 우월한 몸매에 어울리지 않는 뭔가 숨기고 눈치 보는 듯 당당하지 않은 얼굴 표정이 보였다. 갱년기 같은 나이 듦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 이래선 안된다. 내 모든 것과 바꾼, 모든 걸 줘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 더 이상 망가져선 안된다, 더는 자신을 갉아먹게 해선 안된다 싶었다. 힘들어도 견딜 수 있고, 보고 싶어서 내가 그를 만나는 한 그는 같은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내가 사랑한 그는 없어질 것이다. 그래선 안된다.


하고 싶은 말이 켜켜이 쌓여있고, 묻고 싶은 말도 한가득이지만 그가 불편할까 봐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우리가 5년 동안 헤어져 있던 시기를 빼면 오랫동안 서로밖에 없었다. 나를 버린 이유가 경제적이든 정신적이든 내가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테니, 다른 사람이 궁금할 수 있다. 궁금함이 충족될 때까지 보고 와도 된다. 얼마가 걸리든 충분히 바람 쐬고 와도 된다. 나는 같은 자리에 있을 테니 나를 버리지 마, 그거면 돼. 이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현재 조건과 다를 바 없으니 그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머리로 이해하는 건 즉각적이고 휘발성이 높고, 태도는 DNA와 오랜 습관으로 자연스레 몸에 배였다는 점에서 다르다. 상수가 그대로일 땐 변수를 조금이라도 움직여야 변화를 바랄 수 있다.


그에게 더 실망하기 싫다는 이유를 억지로 붙이고 그만 보자고 했다. 얘기하는 중간, 쏟아지려는 눈물을 겨우 참았다. 돌아오는 버스 차창에 비친 내 눈엔 소리 없는 눈물이 계속 흐른다.


그렇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언제 끝날 지 모를 시간 속으로 떠나기로 했다.

부디 꼭 건강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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