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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딜리버 리 Dec 31. 2023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2023년 12월 31일

나도 과거의 상처가 있을 테지만 좋았던 추억이 먼저 떠오르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쪽이라 스트레스를 거의 받지 않는다. <올드보이> 오대수처럼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 진 않지만,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와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 보다 지금 살고 있는 ‘현재‘를 중심에 두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연말이라고 한 해를 돌아보고 내년은 어땠으면 하는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2023년 오늘이 마지막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올해처럼 아프고 슬펐던 적이 있나 싶다, 없다. 가능하지 않을걸 알지만 털어낼 수 있으면 털어내자는 마음으로 기록한다.


오랜 시간을 사귀었고, 2014년 그와 삐걱대던 중 헤어졌다. 사랑은 감정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헤어지고 나니 내가 이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느냐가 아니라 이 사랑을 얼마나 지키고 싶은 의지가 있느냐의 문제였다. 우리의 삐걱대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충분한 노력(대화)을 하지 않았고, 순간순간 일어나는 감정을 여과 없이 표출해 그에게 상처를 줬다.


그로 부터 두 번 다시 연락하지 말라는 마지막 문자를 받고 연락할 엄두를 못 냈다. 5년 후 그의 문자를 받고 기다렸던 연락인데 꿈인가 싶어 한참을 멍했다. 그에게 잘못했던 점, 상처 준 걸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다. 5년 만에 만난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고(나이가 들어서인지 약간 억세진 느낌?), 나는 그를 여전히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온통 그의 생각뿐이었다.


정말 미안하고 염치없지만 또 한 번의 배신과 그동안 쌓아온 관계를 끊었다. 내 모든 것을 버려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피할 수 없는 그였다.


관계 청산 비용을 지불한 그의 요구가 있었지만 5년 전 내 의지와 노력의 부족에 대한 반성으로 흔쾌히 갚겠다 했고, 3년 넘게 갚았다. 가진 건 몸뿐인 월급쟁이 택배노동자니 연차 사용을 줄이고, 배송인센티브 있는 지역을 지원했다. 매일 몸은 힘들고, 매달 주머니 사정은 빠듯했다.


보잘것없는 재산이지만 전부를 잃고, 경제적 형편이 더 힘든 나에게 자신이 지불한 돈까지 갚아야 부담을 지우나 하는 억울함을 가져본 적 없다. 나의 지난 잘못에 대한 반성에 따른 최소한의 대가였다. 하지만 파국이 왔을 때 그는 내 부주의로 그 돈을 지불했다며 나를 탓하고 공격했다. 나의 부주의가 없었다면 괜찮았을까?


4월 1일, 그가 무릎이 안좋아서 몸무게를 줄이기로 했고 목표 실패의 댓가로 백만원을 받았다. 그 돈이 목적이 아니었으니 필요치 않았고, 뭘 할 것도 없었다. 그가 최신 아이폰을 사라, 난 괜찮다 했는데, 여행 가서 멋진 사진 많이 찍어달라 해서 덜컥 구매했다. 일주일 후 만남에서 아이폰으로 그의 멋진 얼굴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멋진 모델에게 지금껏 너무 후진 카메라를 썼구나. 그 후 주고받은 메시지 느낌이 뭔가 찜찜했지만 컨디션이 안좋아 그런가 싶었다. 4월 15일, 마음의 빚과 반성의 대가를 마지막으로 입금하고 기쁜 마음에 문자를 보냈는데 그의 반응이 너무 짧고 사무적이었다. 서운했지만 새롭게 시작될 우리의 미래를 꿈꾸느라, 앞으로 닥칠 일은 짐작도 못했다. 그 시작은 오랜만에 떠날 8월 체코 여행이었고 당연히 들떴다. 하지만!


이틀 뒤, 그는 여행 못 가겠다, 다른 사람을 만나겠다는 문자를 갑자기 보냈다. 24시간은 누구에게나 같은 분량일 텐데 느닷없는 이별을 통보받은 후로 하루가 정지된 듯 더디게 흘렀다. 몸과 마음이 무너지고 있었(는데 몰랐었)고, 결국 출근길 회사 앞에서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갔다.


갑자기 왜? 처음은 당혹스러웠다. 4월 이전부터 그는 거식증에 걸린 듯 식욕이 없고 소화가 잘 안 된다 했고, 그가 잘 못 먹으니 어딜 가든 그가 먹기 편하거나, 죽집을 먼저 찾았다. 다행히 나를 만나면 잘 먹어서 농담으로 식욕 없는 거 맞냐 물으면 내가 편안해서 그렇다, 했다.


지난 시절, 그가 더 나아지기 바란다며 지적질, 여과 없이 드러내는 감정 표현 등 무수히 많을 나의 잘못된 방식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 그가 요청하기 전엔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비판) 절대 금지, 지키려고 정말 노력했다.


과거 경력을 내세워 택배노동을 피하지 않았고, 힘듦을 징징대지 않았다. 나의 행복은 그를 만나는 것이니 그날만 기다렸고, 그에게 집중했고, 진심으로 사랑했다.

편안하다

내가 진심을 다한 게 인정받는 것 같아 그 말이 그렇게 좋았다.


그가 2~3년 뒤에 같이 살 수 있다 했고 그 시점이 지났다. 그를 볼 수 있으면, 옆에 있으면 된다. 그 말을 못 할 사정이 있을 테고, 그의 진심을 확인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편한 친구 이상의 감정은 아닌 것 같다는 말을 했을 때도 괜찮다 했다. 돌이켜보니 그는 이미 다른 마음이 들었고, 관계 정리를 준비하고, 시그널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눈치가 없었나?


사실이라고 믿었던 것들, 안다고 생각한 사람, 이제는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어렵게 다시 시작한 우리의 만남에 이런 결과가 오리라곤, 상상했던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 이건 아니었다.


원망스럽고 슬프고 아파도 여전히 그가 보고 싶었다. 그를 보지 못하는 시간이 너무 힘들어 친구로 지내자고 매달렸다. 어떤 조건이어도 그를 볼 수 있으면 괜찮았고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친구)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없는 태도가 반복되고, 그때그때 이런저런 핑계와 이유를 대느라 거짓말도 자연스레 하는 그를 보면서, 궁색한 변명을 하느라 고생하는 그를 지켜봐야했다. 날개를 접고 추락하기로 작정한 듯 한없이 추락하는 그에게 이제 그만 보자는 말을 꺼내야 했다, 꺼낼 수밖에 없었다.


2023년 12월 12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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