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가 싹을 틔워 꽃이 되어 나오길

이것은 주짓수하는 얘기가 아니다. 여행자의 이야기이다.

by Binny

여행을 좋아한다. 지금보다 조금은 어렸을 때부터 혼자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 신경 쓸 것 없이 자유롭게 다니고 싶다는 약간의 객기로. 지금은 친구와 함께 가고 싶어도 서로서로 바쁜 삶에 치이다보니 시간이 맞지 않아서. 가장 오랫동안 홀로 다녔던 것은 지구 반대편 중남미에서 1년 넘게 흘러다닐 때였다. 물론 이 오랜 기간 항상 혼자 다닌 것은 아니다. 봉사활동으로 만난 동료들, 호스텔에서 투어에서 오며가며 함께 다닌 친구들, 내게 한국어를 배우던 학생들, 쉐어하우스에서 같이 살던 룸메이트들과 그 친구들의 친구들. 혼자 하는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안다. 혼자일 때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여행지를 정하기 전, 도장을 찾아본다. (덤으로 빨래방도 찾아본다. 도복은 소중하니깐요.) 누군가 여행지 맛집을 검색하고 있을 때, 도장을 찾아보고, SNS로 그 곳의 분위기를 구경하면서 갈 곳을 고르는 것도 나름의 큰 즐거움이다. 모두가 눈도장 찍는 관광지에 휩쓸려 눈 호강 하는 것도 좋지만, 다른 곳의 같은 취미를 가진 이들과 구르며 땀 흘리는 것은 — 모두가 누릴 수 있는 호사가 아니다. 게다가 도장에 가면 숨은 맛집 정보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홀로 여행하는 것은 분명히 위험하다.


혼자 여행한다고 해서 위험도가 미친 듯이 높아지고 그런 건 아니다. 한 번 쯤은 들어본 여행자 안전 수칙 — 한밤중에 만취 상태로 용기백배해서 인적없는 어두컴컴한 빈민가를 혼자 돌아다니지 마세요 —정도만 지킨다면 크게 위험할 것은 없다. 먹고 살기 팍팍한 나라에 가면 소매치기를 마주칠 수도 있겠지만 혼자든 여럿이든 마주치는 건 매한가지다. 말과 모습이 다를 뿐 그 곳 역시 사람사는 곳이고 사람사는 곳이라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생긴다. 그리고 더 많이 만날 수 있는 건 좋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 나쁜 일은 확실히 많아진다.


작은 체구의 아시안 여자. 어디서든 타겟이 되기 쉬운 조건이다. 혼자 다닐 때면 주변이 시끄러워진다. 남미든, 서구 국가든, 아시아든 다를 바 없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이럴 때는 만국 공통의 언어를 어찌 그리 잘 사용하시는지. 입꼬리를 일그러뜨리고 낮게 끄는 감탄사. 대놓고 I love you 라고 불러대는 것까지 만국 공통이다. 여럿이 있다면 기분 나쁜 웃음이나 환호도 뒤이어 따라온다. 내가 혼자 산책을 하고 있다고 해서 슬쩍 다가와서 추파를 놓아도 된다는 건 아니다. 혼자 해변에서 햇볕을 쬐고 있다면 그건 그 평화로움을 만끽하고 싶기 때문이지, 누군가 은근 슬쩍 말을 걸어줬으면 하는 것도 아니다. 혼자 맥주를 한 잔 하고 있다고 해서 내가 그 모든 저질스러운 말들을 들어야 할 의무가 생기는 것은 결코 아니다. 길을 가다 Cat Calling을 들으면 그 자리에서 귀를 씻어버리고 싶다.


그래도 이번 여행에서는 꽤 큰 소득이 있었다.


트레이닝이 끝나고 홀로 여행하는 4일. 상대방을 똑바로 바라보고 “기분 나쁘니까 그만 좀 꺼져줄래?” 라고 적어도 다섯 번은 얘기할 수 있었다. 그 모든 소리를 떨쳐낼 수는 없었지만서도 이 정도면 나름, 성공적. 난 지금 막 MMA 캠프에서 나온 여자니까! 내가 “그만 꺼져줄래?”라고 얘기했을 때, 혹여나 상대가 — 저런 배불뚝이 아저씨 쯤이, 저런 비리비리한 남자 정도가— 달려든다면, 초크라도 걸고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거든. 만약에 — 라는 상상 속의 위험이 나도 모르게 두려워서 어색한 웃음과 종종걸음으로 빠져나가고는 했었는데. 말 한 마디 별 것 아닐 지 몰라도, 작은 용기가 언어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기뻤다. 작은 용기가 말로 나오면, 그 말은 조금 더 큰 용기가 되어서 돌아온다. 씩씩하게 홀로 여행하는 모든 여자들에게 그 용기가 싹을 틔워 꽃이 되어 나오길!




PS.

내가 이 이야기를 각기 다른 자리에서 서로 다른 인종과 국적을 가진 네 명의 남자들에게 했을 때, 하나같이 고구마 퍼 먹는 대답을 했는데. — 진짜? 난 여자들도 다 좋아하는 줄 알고 그런건데? 그렇게 받아 들일 게 뭐 있니. 그거 다 너 칭찬한다고 그러는 거다. 자랑스럽게 생각해! 등등 — 적어도 내가 만났던 모든 여자들은 진절머리쳤다. 여자들 엄청 싫어한다.


— 그러니까 여성분들 주짓수를 배웁시다. (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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