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열매』
숲을 좋아합니다. 제주도의 여러 자연림들, 그 안을 거니는 건 청명하고 여유롭고 고요한 시간을 줍니다.
나무도 좋아합니다. 키가 작은 나무도 있지만 나무하면 대개는 오랜 시간 살아와 키가 쭉쭉 뻗은 큰 나무가 연상됩니다. 우리는 숲 속을 거닐 때 우리키의 딱 그만큼 까지만 나무와 마주합니다. 고개를 뒤로 젖혀 나무의 꼭대기를 밑에서 올려다보며 ‘와! 높다.’ 나무의 위를 짐작할 수는 있지요. 그런데 이 책을 보고 나무 꼭대기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나무를 타 본적은 없습니다. 아이들은 나무를 잘 타더군요. 그래도 나무를 잘 타는, 몸이 가볍고 민첩한 아이들도 큰 기둥을 올라가 가지가 쳐져 있는 곳 정도까지만 오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나무 꼭대기까지 오르기는 쉽지 않지요. 나무 기둥은 굵고 단단해도 끝으로 갈수록 잔가지들이 뻗쳐 있으니 몸을 지탱하기 쉽지 않습니다. 어쨌든 ‘나무 꼭대기’ 별로 생각하거나 상상해본 적이 없는 공간입니다.
아기 곰 한 마리가 있습니다. 곰은 위에서 떨어진 빨간 열매가 더 먹고 싶어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곰이 이렇게 나무를 잘 타나? 새끼 곰 같지 않은데? 그런 의심들은 조금 뒤로 하고 페이지를 넘기며 곰을 따라가 봅니다. 나무 위로 올라가는 곰의 모습이 가까이에서도 보이고 멀리서도 보입니다. 나무 위를 올라가고 있는 중이니 세로로 죽죽 뻗은 나무기둥이 화면을 꽉 메우고 있습니다. 곰은 나무를 다 올라갔지만 빨간 열매는 찾지 못했습니다.
곰은 뒷모습을 보인 채 나무 꼭대기에 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뾰족한 나무 꼭대기에 올라 작은 나뭇가지를 밟고 한 손으로 나무 기둥을 잡고 서 입는 곰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납니다. 가능하지 않은 포즈이지요. 거기 어떻게 그렇게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림은 우리에게 곰이 보고 있는 것을 같이 보라고 이야기 합니다. 마치 프리드리히의 그림처럼 말이지요.
새끼 곰은 구름 저 뒤로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혹은 지는) 태양을 보고 있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크고 붉은 동그라미입니다. 나무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해. 빨간 열매를 찾아 나무 꼭대기까지 오른 새끼 곰은 세상에서 제일 클지도 모를 빨간 열매를 마주합니다.
그림은 줄곧 검은 먹의 농담만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연하고 진한 선과 덩어리 중 색은 오로지 붉은색뿐입니다. 아, 이 책에서 또 다른 색이 하나 더 나오기는 합니다. 그러고 보니 앞 면지 색은 붉은색이었는데 뒤 면지 색이 이 색이네요. 무슨색일까요? 저녁이 되면 상상할 수 있는 것의 색입니다.
어쨌든 앞에서는 빨간 열매가 그렇고, 나무를 오르며 만나는 애벌레, 다람쥐 등도 모두 붉은색입니다. 원래 붉은 색은 아니지만 그냥 붉게 칠해졌습니다. 빨간 열매를 찾아다니는 새끼 곰의 눈에는 모두 그냥 붉게 보였을까요? 마지막 가장 큰 붉은색 동그라미는 나무 꼭대기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곰의 몸과 나무의 가장자리를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들입니다.
매년 새해 많은 사람들이 1월 1일 떠오르는 태양을 보러 바다로 산으로 떠납니다. 크고 붉게 떠오르는 해는 새로운 한 해의 희망을 상징하며 여러 다짐을 하게 합니다. 벅찬 기운과 감동을 선사합니다. 그러니 붉은 해가 떠오르는 모습은 나무 맨 꼭대기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바다에서, 산에서, 빌딩 숲 사이에서 보는 해가 다르듯, 이렇게 나무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해도 분명 다를 것 같습니다.
동화작가 필리파 피어스의 「목초지에 있던 나무」에 이런 문구가 나옵니다. ‘오직 새와 비행기만 보았을 (나무) 꼭대기’. 맞습니다. 우리는 높은 나무의 꼭대기를 볼 수 없습니다. 베어 쓰러진 나무가 있다면 그때는 나무 꼭대기를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꼭대기는 땅 밑으로 내려온 꼭대기입니다.
나무 꼭대기는 어떤 공간감을 선사할까요?
나무 꼭대기에 올라 바라보는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 공간이 궁금해집니다.
꼭대기를 보는 일,
꼭대기에서 보는 일,
그걸 이렇게 누군가의 상상을 통해서 짐작하고 그려봅니다.
이 하나의 그림
붉은 기운이 온 세상을 물들인다.
아주 큰 빨간 열매
나무꼭대기에 오른 곰의 뒷모습은 조금 우습다.
하지만 새끼 곰이 처음으로 마주한 풍경은 하나도 우습지 않다.
아마 나는 그곳에서 해를 볼 수 없을 테지.
살아가면서.
평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