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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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쓴 글이다.
더운 여름이 오고 있는데...
어제는 여름의 책이었으니
오늘은 겨울의 책으로 시원함을 느껴볼까? 라며 올려 본다...
겨울이 다가옵니다. 젊을 때는 장갑을 챙겨서 끼고 다닌 기억이 없습니다. 손에 딱 맞는 고급스러운 가죽 장갑을 선물 받은 적은 있지만 격식을 차려야 할 자리에나 끼고 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손, 발, 목이 따뜻하면 몸이 훨씬 따뜻하다는 걸, 추운 날도 좀 더 견딜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껍고 따뜻한 장갑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많이 추운 날만 챙겨 나가는 것 같기는 합니다.
장갑 하나로 따뜻함을 이야기하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겨울을 담은 그림책은 많습니다. 눈이 나오는 책이 단연 으뜸일 테고, 추우니 따뜻함을 이야기 하는 책이 또 많을 겁니다. 우크라이나의 민화인 이 이야기도 여러 글 작가들이 각색하고 그림 작가를 달리해서 많은 책이 나왔습니다. 그림은 에우게니 M. 라쵸프 로 같지만 번역자가 달라지기도 했고, 다른 제목 『털장갑』으로 나오기도 하고, 최근에도 새로 『장갑』이 나왔습니다. 각 그림책마다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도 겨울이 되면 저는 이 책을 꼭 다시 꺼냅니다. 아이들에게 이 책은 꼭 읽어주고 겨울을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에우게니 M. 라쵸프의 그림이 귀엽거나 친숙하게 다가오는 그림은 아닙니다. 옷을 입고 있긴 하지만 동물들은 각각의 특징을 살려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거든요. 멧돼지의 뿔, 곰의 털 등이 동물들을 상냥하거나 친절하게 보이게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들 책이라고 해서 팬시용품의 캐릭터처럼 동물들을 귀엽고 앙증맞게 표현해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크기도 다르고 사실적으로 묘사된 여러 동물들이 함께 어울리는 것이 더욱 신기하고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이야기는 강아지와 산책을 하던 할아버지가 툭 떨어뜨리고 간 장갑 한 짝에서 시작됩니다. 눈발이 휘날리는 겨울 숲속에서 털이 북슬북슬한 장갑은 따뜻한 안식처입니다. 동물들이 하나씩 차례로 등장합니다. 생쥐, 개구리, 토끼, 여우, 늑대, 멧돼지, 곰 까지. 작은 생물부터 장갑 안으로 들어갑니다. 추운 겨울이니까요.
동물들이 한 마리씩 들어갈 때마다 장갑 안의 공간은 넓어져야 합니다. 무너져서도 안되겠지요. 그래서 장갑에는 어떤 장치들이 생겨납니다. 나뭇가지로 장갑을 지탱하는 받침대를 만듭니다. 창문도 뚫습니다. 사다리도 만들었지요.
안에 있는 동물들은 점점 큰 동물들이 들어온다고 할 때마다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좁아서 안 된다고요. 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자리를 조금씩 좁혀 모두 들어올 수 있도록 마음과 공간을 내어 줍니다.
다른 그림책에서는 자기보다 더 큰 동물이 무서워서, 잡아먹힐까봐 두려워서 자리를 내어주는 것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별다른 이유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라며 그냥 자리를 내어주지요. 그런데 그게 이상하거나 석연치 않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냥 다들 같은 마음 아니겠는지요. 그 이유를 굳이 현실적인 힘의 논리로 설명할 필요, 없어 보입니다. 저는 이 점 때문에 여러 장갑 그림책 중 이 책이 제일 좋습니다.
이 책에 재미를 더하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동물들을 수식하는 말들입니다. 생쥐는 그냥 생쥐가 아니라 먹보 생쥐입니다. 개구리는 팔짝팔짝 개구리, 토끼는 빠른 발 토끼, 멋쟁이 여우, 잿빛 늑대, 송곳니 멧돼지, 느림보 곰. 동물들의 특징을 잘 잡아낸 수식어들은 한 동물이 등장할 때마다 반복됩니다. 먹보 생쥐, 팔짝팔짝 개구리, 빠른 발 토끼, 멋쟁이 여우, 잿빛 늑대, 송곳니 멧돼지, 느림보 곰. 이렇게 반복되니, 책을 읽어 주면 어느새 아이들은 조막만한 입으로 “멋쟁이 여우!” “빠른 발 토끼!” 힘차게 따라합니다.
장갑을 잃어버린 것을 안 할아버지가 강아지와 함께 돌아옵니다. 한순간에 동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장갑은 떨어졌을 때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아. 한순간 환상이었을까요? 들판 저 끝으로 붉게 노을이 지는 것도 같은데, 한바탕 꿈만 같습니다.
그 동물들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어딘가에서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있겠지요? 장갑 입구로 오밀조밀하게 얼굴을 내민 동물들, 아랫목 이불 밑에 들어가 쏘옥 얼굴만 내밀고 이불로 굴을 만들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어디에 누구와 있든,
겨울이 오면 장갑을 끼고
꼭 따뜻한 곳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이 하나의 그림
동물들이 자꾸 자꾸 들어간다.
어떻게 다 들어갈 수 있을까?
터지지 않을까?
무너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이 더해진다.
크건 작건 사납건 순하건
추운 겨울 따뜻한 곳을 찾는 마음은 한결같다.
그 마음을 이해하는 동물들은
내 자리가 조금 비좁더라도
기꺼이 자리를 내주고 들어오라 한다.
내 곁에는 누가 있나
나는 누군가에게 곁을 내어준 적이 있나
문득,
옆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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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의 그림 인쇄 상태는 좋지 않다. 해상도가 떨어져서 보는 맛이 현저히 떨어진다. 젠 브렛이 그린 그림에 비하면 투박하고 거칠다. 하지만 라초프의 상상력은 그것을 능가할만큼 멋지다. 젠 브렛의, 장갑 안에 동물들이 들어가 있는 그림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못에 걸어 놓은 조그만 종과 세모 고깔을 쓴 굴뚝에서 연기가 난다. 추운 겨울 모두 모여 언 몸을 녹인다. 이 얼마나 아늑한 공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