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눈을 반짝이게

『어쩌면 행운아』


내가 이 책을 어쩌다 읽게 되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작년 겨울 어느 날 기록을 올렸으니 그 때쯤이었던 것 같은데. 겨울, 회색, 눈, 잿빛, 어디에도 겨울을 지칭하는 단어는 없지만 겨울과 잘 어울린다 느꼈던 기억은 있다.


책을 처음 읽을 때는 어떤 이야기지? 스토리가 궁금하니 죽죽 이야기를 따라 가며 읽는다. 그런데 이 책은 읽는 내내 모호했다. 온통 감각을 자극하는 색, 분위기만 가득하고 이야기는 명확하지 않았다. 추리 소설도 아니건만 마지막에 가서야 이야기가 풀어지고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꼭 다시 한 번 더 읽어 보고 싶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모호했던 것들이 두 번째 읽으니 조금 명확하게 드러난다. 펠릭스 혹은 안더스, 벤, 니쎄 이렇게 세 아이의 관계, 그 중 한 아이의 부모, 가정, 선생님, 이웃 그리고 사회.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것들이 조금씩 뚜렷해지며 도드라져 보였다. 자식을 대하는 엄마와 아빠의 태도, 어린이를 대하는 이웃 슈탁, 학생을 대하는 선생님 사비네 그리고 힘의 관계가 변하는 세 친구. 각자 자리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하며 주인공 펠릭스 혹은 안더스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읽는 내내 음울하고 두렵다. 안더스는 사람에게서 색을 보는데 그 색이 다채롭고 아름다기 보다는 전체적으로 회색빛, 검은빛이다. 안더스가 내면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것이 속 시원하기 보단 다른 아이들과 같이 두렵다. 마치 만화 <몬스터>를 보듯, 드라마 <킬미힐미>에 나왔던 다중인격을 보듯,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의 콜럼버스 총기 난사 사건을 보듯.


모든 것이 조금씩 극단적으로 보인다. 부모가 낸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펠릭스, 오랜 시간 후에 깨어나 이름을 안더스로 바꾸고 전혀 다른 아이가 된 그는 30미터 나무에서 뛰어 내리고 깊은 웅덩이에 몸소 뛰어 든다. 그것은 일종의 자살처럼도 느껴졌는데.


책 속 그림


어른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억압받는 청소년들의 마음 색은 이렇게 잿빛인 걸까?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다면, 언제든 자기 생을 버릴 수 있을 만큼 충동적인 걸까?


그렇게 내내 음울하다 죽다 살아난 펠릭스는 잊었던 기억을 되찾는다. 그리고 사고가 발생하던 날 결심했던 바를 떠올린다. 세 친구가 함께 불을 질렀다. 다른 생명까지 아프게 했다. 그것은 잘못이다.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 펠릭스에서 안더스가 된 아이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진정으로 표현하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고, 결심을 실행에 옮기고 용서받고 한걸음 성장한다. 그제서야 부드럽고 평온하고 조금은 환한 빛이 아이들을 비춘다.


아이가 아이다와질 때가 있다. 아빠와 슈탁과 함께 새로운 헛간을 다시 지을 때! 깊고 짙어 어두운 회색 눈동자가 밝게 뒤까지 환하게 빛난다. 어쩌면 우리 아이들은 원래 그런 눈동자를 지니고 있는 거 아닐까? 아이들의 눈을 반짝이게가 아니라 흐리멍텅하게 만드는 건, 귀차니즘으로 가득한 아이들로 만드는 건, 그들에게 끊임없이 주어지는 해야만 하는 일들! 왜 하는지도 모르는 일들! 이 아닐까.


따뜻한 어른과 이어지고 싶은 아이는 손을 내민다. 아이의 손이 어른의 손에 가 닿는다.


‘너도 알다시피, 너를 둘러싼 너 같은 수많은 사람들은 너무 헤매고 있고, 너무 외롭고 피곤하고, 또 가난하잖니. 우리는 손을 맞잡지 않으면 안되는 거야. 더 나아지기 위해서. 그런데 우리는 그러지 않아. 그러지 않지.


슈탁은 오래도록 침묵했다. 어느 틈에 그는 아이의 손이 자기 다리 위에 놓여 있는 걸 느꼈다. 그는 따뜻한 손을 만지면서 아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이 손을 아주 조금이라도 압박한다면, 이 손은 새알의 작고 얇은 껍질처럼 부서져 버릴 거야.’ p175~176


주저하는 걸 눈치 챈 안더스가 불쑥 아빠 손을 잡았다. 그러자 안드레 빈터에게 옛 기억들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품에 안긴 아주 작은 생명체, 아주 가볍고 아주 부드러운 향기, 이미 그때부터 어두웠던 잿빛 눈동자, 그리고 너무 가늘어 거의 들리지 않던 옹알이..... 안드레 빈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더스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큰 손에 놓인 이 작은 손을 다시 놓치지 않으려면 무얼 해야 하는지를.’ p180-181


따뜻하고 조그만 손은 신기하게도 어른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아빠가 안더스의 손을 잡고 슈탁이 안더스의 손에 의지한다. 손으로 전해지는 교감과 온기가 느껴진다.





아기를 처음 키우는 육아의 세상은 버거웠다. 힘들어서 자는 아가 옆에 몸을 살짝 기대고 있는데 작은 새가 팔딱대듯이 조그맣고 규칙적으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눈물이 났다. 나에게 전해지는 아가의 조그만 손길, 심장 뛰는 소리, 따뜻함이 큰 위로를 전해 주었다. 이 책은 그 때를, 그 여리고 작은 생명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


그리고 청소년, 다 큰 어른처럼 느껴져도 아직은 이렇게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이 필요한 아이임을 깨닫게 한다.


청소년 시절 우리 아이들이 어떤 질풍노도를 겪을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아이들 눈이 반짝이는 것을 잃지 않도록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부모가 모든 걸 다 해주겠다는 게 아니라

스스로 빛나는 존재인 그 환한 빛을 ‘잃지’ 않게,

자신들이 그런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해주고 싶다.


어제 큰 아이가 열이 났다. 코로나 검사를 받게 하기 위해 대신 줄을 1시간 30분이나 서서 기다리며 읽었다. 그러면서 두 번 읽을 정도는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글을 쓰다 보니 한 번 더 읽고 싶어진다. 결국아이를 생각하게 했네. 아이들이 잘 클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네. 청소년보다는 어른이 읽어야할 소설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진: 아침



* 『어쩌면 행운아』 안드레아사 슈타인회펠 글, 이명아 옮김, 여유당

*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홍한별 옮김, 반비

* 『몬스터 MONSTER』만화, 우라사와 나오끼 지음

* <킬미힐미> MBC 드라마, 진수완 극본, 김진만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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