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갔다. 겨울이 온다.

이수지 작가 원화전 ‘여름 협주곡’을 다녀와서

에어컨을 켜지 않으면 집에 머물 수 없던 날들은 가고 가을 날씨로는 이례적이라는 한파가 찾아왔다. 갑자기 닥친 추위에 밖에 나갈 땐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몸은 잔뜩 움츠린다. 그런데 난 지금 창문을 꼭꼭 닫고 비발디의 ‘여름’을 듣고 있다. 이수지 그림책 《여름이 온다》에 있는 QR 코드를 재생시켜서. 익숙한 음이지만 제대로 들어 보는 건 처음이다. 겨울이 오려는 지금, 지난 여름을 떠올리며 당신들의 여름은 어떠했는지 물어본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 매년 최고로 덥다는 여름, 나아지리라 믿었던 코로나가 다시 기승을 부렸던 여름이었다. 방학이면 오전부터 마을에 있는 방과후에 갔던 아이들이 코로나로 집에 내내 머물러야 했던 여름, 학원을 하나도 다니지 않는 3학년, 6학년 아이 둘과 무엇을 하며 방학을 보내야 할지 막막했던 여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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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계획표를 짰다. 아주 느슨하게, 은근슬쩍 나의 바람을 넣어서. 목요일 오후에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엄마가 가자는 곳 가기!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알부스 갤러리(Albus Gallery)에 갔다.


국내 최초 일러스트레이션 전문 갤러리로 2017년 문을 연 곳이다. 요안나 콘세이요 전시 때 처음 방문했는데 이후 전시를 챙겨 찾지는 못했다. 마침 이수지 작가 개인전(여름 협주곡 8.4~10.10)을 연다니 ‘오호라’ 기뻐하며 길을 나섰다. 한여름 오후, 두 아이와 함께 마을버스, 지하철을 타고 육교(이 육교에는 엘레베이터가 있다. 아이들은 육교가 낯설다. 육교에 오랜만에 올라 풍경을 바라본다)를 건너 마침내 도착한 곳, 역시 갤러리는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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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색이 넘실대다 - 지하 1층

파란색은 모두의 파란색이다. 그런데 그림책을 보다 보면 이수지의 파란색이 대번에 떠오르는 파란색이 있다. 지하 1층은 갤러리의 하얀 벽을 타고 이수지의 파란 물결이 넘실댄다. 《파도야 놀자》와 《물이 되는 꿈》 그림이 걸려 있어서다. 〈동화읽는어른〉 2020년 10월호 ‘새로 나온 책’ 꼭지에 《물이 되는 꿈》 소개 글을 쓰며 책 제작 과정이 궁금했었는데 이를 엿볼 수 있는 메모가 써 있다.


《물이 되는 꿈》은 루시드 폴의 노랫말에 이수지 작가가 그림을 그렸다. ‘물이 되는 꿈’ 노랫말을 처음 들었을 때 작가는 단순히 목욕하거나 물에서 노는 아이를 떠올렸다 한다. 그러다가 ‘물속에서 더 자유로운 아이’로 생각이 뻗어 지금의 책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림책 《물이 되는 꿈》은 몸이 불편한 아이가 물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그림이 보여주는 독자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병풍처럼 죽 이어지는 형식이 페이지를 접고 펼침에 따라 드러나며 이어지는 이야기가 파랑의 농담으로만 표현되어 파란 물결을 타고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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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은 결국 무대 – 1층

2002년에 이탈리아에서 출간되고 한국에는 2015년에 나온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수지 그림책 중 비교적 덜 알려진 것 같다. 나도 한 번 쓱 보고 지나친 기억이 있다. 책 내용은 앨리스처럼 토끼를 따라 이상한 세계를 여행하는 아이, 명화, 그림자, 거울 등 여러 장치들이 등장한다.


이야기가 벌어지는 작은 무대가 있고 그 무대는 다시 거실 벽난로 속에 있다. 벽난로가 있는 거실은 책 속에 있다. 점점 뒤로 물러나며 현실 세계로 빠져나오는 듯한, 결국 모든 이야기는 그림책이라는 무대 안에서 펼쳐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우리 삶 또한 나만의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하나의 극이 아닐지. 전시장에는 한쪽을 무대처럼 설치하기도 하고 미니어처로 제작된 설치 작품도 있어 아이들도 요모조모 흥미롭게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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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멋진 여름 날 – 2층

《여름이 온다》는 무려 148쪽의 그림책이다. 이렇게 전시회도 여니, 그림책은 마치 중견 작가의 두툼한 전시 도록 같기도 하다. 비발디 사계 중 여름을 듣고 그렸다는 그림책 《여름이 온다》는 3악장의 음악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뉜다. 2층은 마치 지하의 푸른 물과 1층의 무대 그리고 지금 여름이 모두 한데 어우러진 느낌이다.


주황, 분홍, 갈색 등 다양한 피부색으로 표현된 가족(아이, 청소년, 어른. 강아지)이 한데 어울려 논다. 혈연으로 묶이진 않은 것 같지만 강한 유대감과 친밀감이 그들 사이에 흐른다. 한여름 더위를 식히기에 물놀이만한 게 있을까?


물풍선으로 시작해 물총, 호스까지 동원, 신나게 물놀이를 한다. 그러다 바람이 불고 먹구름이 몰려온다. 세찬 빗줄기가 나리고 번개가 번쩍 친다. 우산은 하늘 저 멀리 날아가고 점점 세차게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사람들은 손을 잡고 서로를 의지해 버틴다. 어느새 폭풍은 지나가고 잔디에는 여기저기 물웅덩이가 고였다. 여름날 한때의 풍경을 만든 가족, 오선지를 타고 흐르며 음악과 노는 가족과 음악을 연주한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모두 인사를 하면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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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디의 ‘여름’을 굳이 듣지 않아도 음악 분위기가 느껴진다. ‘여기서 고조되겠구나.’ ‘여기는 잔잔히 흐르겠구나.’ 아이들은 물놀이 그림이 걸려 있는 벽 앞에 한참을 머문다.


‘물풍선을 이렇게 던진 거야.’ ‘호스를 세워 들면 물이 이렇게 튕기지.’ 자주 하는 물장난, 물총 놀이가 떠올랐던 걸까? 그림 속 인물들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다가온 걸까? 재잘대며 동작을 하나하나 따라한다. 2층 한쪽 통 유리창 밖으로 초록색 잎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벽을 가득 채운 그림들, 한쪽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비발디의 여름. 그날 그곳은 여름이 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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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그림책을 보며 책장 속에 꼭 잠겨 있기에는 아까운 그림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끔 흰 벽에 그림책을 기대 놓고 오며 가며 그림 보는 것을 즐겼다. 그런데 전시를 보고 나오는데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림책의 원화를 직접 보는 것도 좋지만
그림책의 그림은 책으로 볼 때 더 좋다.



전시장 그림 또한 공간과 동선을 고려해 하나의 맥락 하에 그림의 순서를 정하고 건다. 보기 좋고, 예쁘다고 아무렇게나 턱 턱 거는 것이 아님을 잘 안다. 이번 전시도 그림 간 연결 고리가 있고 이수지 그림은 색과 선 하나하나 생동감이 있어 하나씩 보기에도 좋다. 그런데 책으로 보는 것이 더 좋다는 걸 알았다.



그림책은 한 장 한 장 페이지가 넘어가며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져 빚어내는 이야기가 있다. 이 그림 다음에 다른 그림이 아니고 바로 이 그림이 와야 더욱 좋다. 그렇게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다 보았을 때 완성되어 다가오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책을 읽는구나. 그림의 이야기, 그게 그림책이구나.’를 새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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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온다》 책은 ‘여름이 왔다’로 끝을 맺는다. 지금, 여름은 진즉에 왔다 갔고 겨울이 오고 있다. 내년에는 코로나가 물러가고 주 5일 학교를 가게 될까? 그 전에 아이들과 겨울방학, 봄방학을 보내야 하는데 이번 방학은 또 어떻게 보낼까? 어떤 전시장에 가자고 아이들과 이야기해 볼까? 방학은 아이들에게도 좋지만 나에게도 아이들과 충분히 무엇을 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니 방학을 버거워하지 말고! 안녕달의 겨울 그림책이 나올 예정이라는데 이번 방학에는 겨울을 흠뻑 느낄 수 있는 어떤 전시를 찾아볼까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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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동화읽는어른> 202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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