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떡집에서 일하던 때의 일이다. 떡집 일을 하다 보니 새벽 출근을 위해 저녁 8시에 자게 되었다. 보통 2~3시에 일어나지만 0시에도 빈번히 일어났다. 따라서 일을 안 하는 날도 8시에 자도록 생활패턴이 형성되어 버렸다.
항상 같은 패턴의 일상. 뭔가 큰 자극이 필요했다. 때마침 경리로 있던 누나가 함께 자취하는 동생을 소개해 준단다. 나는 흔쾌히 수락했고 우리는 서로의 일이 끝난, 저녁 7시에 보기로 했다. 사실 나는 더 일찍 끝났지만. 장소는 잠실. 롯데타워가 생기기 전에는 먹을 만한 곳이 생각보다 별로 없었던 때이지만, 서로 가까운 곳에서 보기로 했다.
저녁 7시. 파스타를 맛있게 먹고 주선자인 누나는 빠져주었다. 우린 카페로 향했고 그녀는 어색했던 초반 십여분 정도 이후엔 곧 활기를 찾았다. 대화를 정말 많이 했고, 만난 지 한 시간 만에 한 달은 만난 듯한 친숙함이 생겼다. 그래, 그게 문제다. 초면에 너무 편해진 게 문제였나 보다.
"그래서 오빠, 제가 아까 병원에서 그 손님 때문에......" 재잘재잘 조잘조잘
"아 진짜? 난처한 거는 아니고? 거기에 누구누구 있길래......" 조잘조잘 재잘재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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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빠?......... 오빠?"
"으응???"
"일어나세요 오빠......"
시간은 8시 반. 잠들고 말았다.
미친 거 아니야? 처음 보는 여자 앞에서, 그것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심지어 대화 중에!
이건 정말 말도 안 됐다. 초면에 편해진 게 문제여선 안되는구나. 그러면 너무 실례니까. 나의 생활패턴에 대해 서둘러 변명했고 그녀는 이해를 해주었다. 너무 미안한 탓에 다음 약속을 서둘러 잡았다.
얼마 안 있어서 우린 건대에서 다시 만났다.
"피곤하면 말해요, 밥 먹고 바로 가게. 크크"
"아니야. 내가 오늘은 야간작업한다고 몸을 세팅하고 왔어. 심야영화도 다 볼 수 있어!!"
"그럼 이따가 밥 먹고 타코야끼도 먹어요. 나 그거 먹고 싶어."
"타코야끼가 뭐야?"
"...... 일단 가요."
베트남 쌀국수를 먹었다. 월남쌈도 먹었다. 월남쌈은 손이 바쁜 음식이니까 졸리가 없다. 다행이었다.
"맛있네요, 이 집. 나중에 또 와요. 저번에 갔던 곳은......" 조잘조잘 재잘재잘
"그래그래. 기억하고 있을게. 하긴 이런 곳은 위생이......" 재잘재잘 조잘조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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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오빠?......... 오빠?"
"으응???"
"일어나세요 오빠......"
시간은 조금 더 버틴 9시였다.
헉. 설마. 이런 미친놈. 또???
"정말 날 죽여라...."
"타코야끼는 다음에 먹어요. 풉"
말도 안 되는 일을 두 번이나 저지른 나. 사실 우리는 만나면서도 서로에게 이성의 감정이 없다는 걸 벌써 알아버렸다. 너무 친한 동생이 되어 있었고 그녀 역시 나에 대한 설렘은 없었다. 그래서 이런 미친 상황 이후로 또 만나는 게 가능했던 거다. 간혹 그녀의 얘기에서 나오는 친한 오빠가 있었다. 아직 어린 듯한 그녀는 그 오빠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확실하게 느끼지 못했었다.
아! 당시에 그녀 21살. 나 24살.
둘 다 어리긴 하지만, 나름 군인 '아저씨' 소리까지 듣고 나왔으니. 뭐 여하튼 듣는 입장의 나로선 그녀의 마음을 파악하기 쉬웠다.
추석 연휴에는 서로 시골에 내려가지 않아서 롯데월드도 갔다. 역시 놀이기구는 못 타는 사람이랑 타야 재밌었다. 자이로 스윙을 탈 때는 안전바를 못 잡도록 손을 잡고 탔다. 다시 말하지만 서로 간에 설렘이 1도 없었다.
결국 이후의 나는 그녀의 연애를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역할이 되어 있었다. 상대는 역시, 그녀의 대화 속에 등장했던 그 친한 오빠.
처음이자 마지막 소개팅
두근거리는 설렘을 뒤로하고 만난 지 한 시간 만에 이미 한 달을 꽉꽉 채워 만난 듯, 아주 친숙한 사이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