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정말 신기해요. 네 시간 동안 오디오가 한 번도 비질 않았어요.
처음으로 사적 대화를 나눈 동생이 말했다. 이 동생과는 교회에서 오래도록 알고 지낸 사이였으나 사석에서 만나 밥을 먹고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 그녀가 장장 네 시간 동안 비는 시간 없이 대화한 것에 신기해하며 말한 것이다.
인사 외에 처음 수다를 떠는 동생과 대체 무슨 얘기를 하길래 쉼도 없이 떠들 수 있었을까. 이야기의 소재거리는 사실 무궁무진하다. 서로 어느 관계이며, 어느 가치관을 지녔는지가 수다의 시간을 결정하게 된다. 일단 대화의 물꼬는 아주 쉽게 트였다. 교회라는 집단에 함께 속해 있으므로 비슷한 가치관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라는 집단 내에서도 다양한 의견과 방향이 존재하지만, 그 역시도 함께 경험하기에 탁월한 이야기 소재거리가 된다. 여기에서 상대의 가치관을 파악하는 것만큼 솔직하게 내 가치관도 드러내야 깊고 긴 대화로 이어갈 수 있다.
얼추 티키타카가 되었다면 이어서는 근황 토크를 가볍게 진행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일상에서의 고민스러운 부분들이 살짝 드러나기도 하고 혹은 누구나 고민될만한 일상들을 말하게 된다. 그럴 때 적절하게 안부를 묻는 것이다. 힘들진 않아? 견딜 만 해?라고. 연애든 학업이든 취준이든 고민이 아닌 일상은 거의 없기 때문에 사적 대화로 이어지게 된다. 십중팔구 연애의 고민이 가장 많다. 학업이나 취준은 어쨌든 설정된 방향이 있기 때문에 그 길을 걷는 노고에 위로를 전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연애같이 관계의 미묘함, 타인과의 소통, 충돌하는 의견차, 멀어지다가도 당겨지는 마음, 제삼자들의 의견 등 무궁무진한 변수에서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자신의 의견을 강화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수다의 인생을 살아온 나로선 이쯤에서 수다에 대한 조언을 던져본다. 한 주제의 대화에서 가볍게 재밌는 대화를 30할 정도 할애하고, 20할은 진중한 나의 이야기를 드러낸다. 그리고 40할은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다. 만일 상대가 말하기 어색해한다면, 먼저 나의 이야기를 20할 중에 조금 꺼내고 관련된 질문을 던져 상대가 대답하며 이야기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남은 10할은 상대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해준다. 객관적인 조언이 되기도 하고, 상대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다만 10할임을 명심하여 과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애써 분류했지만 대부분 이 정도의 대화를 하면 상대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정말로 깊은 관계의 이야기들을 할 때는 반드시 눈을 쳐다봐야 한다. 가족이라든가 자신의 상처라든가 정말 어려운 상황의 이야기들일 때 반드시 상대에게 집중하길 바란다.
다시 동생과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종교 이야기, 연애 이야기, 취미 이야기, 학교 이야기, 회사 이야기 등으로 특별한 주제는 없었다. 다만 한 주제 한 주제마다 조금씩 더 깊어져서 시간이 오래 흐르게 된 것이다. 나에게 있어 타인과의 수다만큼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상대의 이야기를 끄집어내 들을 정도로 듣는 게 즐거운만큼 나 역시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척 즐겁다.
으음, 발표 멈추지 말고 끝까지 해.
대학교 강의 중, 원하는 건축가를 자체적으로 선정하여 그들의 건축물 위주로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40명의 학생 중 한국 건축가를 선정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DDP도 없던 때라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건축물은 김수근 건축가가 지은 것들이 탁월했다. 주어진 발표시간은 5~7분 정도였으나 이미 10분이 흘렀을 때, 눈치를 보는 내게 교수님께서 멈추지 말고 계속 이어가라고 말씀하셨다.
전역 이후 복학하여 나보단 조금 어린 친구들과 강의를 들었는데 많은 친구들이 발표를 쑥스러워했다. 준비를 열심히 한 친구들도 쭈뼛대며 말하느라 잘한 준비가 가려지고 말아서 내가 다 아쉬웠다. 그 와중에 신나서 발표시간을 초과하여 떠든 이가 있었으니, 그게 나였다. 그러다 강의실 뒤편, 전자시계의 빨간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발표를 시작할 때는 14:15, 중간쯤 눈에 들어온 숫자는 14:25, 눈치 보는 내게 끝까지 하라고 해주신 덕에 발표를 마친 시간은 14:30. 직접 찾아가 본 소감까지 모두 다 말해야 직성이 풀렸다. 사실, 더 떠들고 싶었다. 질의응답도 하고 싶었다.
이실직고를 하자면, 학업에 열의가 없던 중고등학생 시절에도 팀별 수업의 발표는 도맡아 했다. 또 너무 나대면 미움받을 수도 있으니 자연스럽게 내가 발표할 수 있도록 여론을 모아야 한다. 사실 아무도 하고 싶지 않아 해서 조금만 능청스럽게,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발표자를 맡으면 님도 보고 뽕도 딴다.
교수님도 웬만큼 수다스러운 분이셨나보다. 발표과제를 내주시며 발표시간을 지키라고 엄중히 말씀하셨지만 시간을 두 배 이상을 초과한 내게 후한 점수를 주셨다.
야! 넌 남자애가 무슨 말이 그렇게 많냐? 그만 좀 해. 어휴, 알았어 알았어.
나다운 것을 수다라고 소개하며 글을 쓰다 보니 수다의 좋은 점들만 어필하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수다의 흑역사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몸싸움은 못해도 말싸움은 늘 이기고(?) 다녔다. 왜소한 체격에 체급이 워낙 낮아 몸싸움엔 불리한 조건이었다. 이미, 질 싸움은 피했던 것이다. 물론 입을 잘못 놀리다간 몸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겠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나는 또래 여자 아이들이나 친누나와도 말다툼을 하게 되면, 요목 조목 따지다가 결국 상대를 울리고야 마는 못된 아이였다. 언제나 말싸움의 우위에 있는 존재는 여자아이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내 말발로 이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울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사실관계를 파악해야 직성이 풀렸고, 모두 파악했다고 생각이 들면 상대가 숨겨놓았던 불순한 의도를 기필코 드러내야만 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대화를 하려 했고, 나는 우기기를 했던 것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어린 마음에, 나는 모두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으며, 그것들을 나의 말로써 모두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니 네가 말하는 너의 상태는 틀렸고, 내가 말하는 너의 상태가 맞는 것이다.
완벽한 말싸움의 승리 끝에 결국 내 잘못이었음을 발견하면 사과마저 수다스럽게 했다. '사실 그때 너는 이러저러했고, 나는 그것을 왈가왈부했는데 이 부분에서 내가 오해했었어. 그런데 너는 그 오해를 발견하지 못했기에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거야'라고. 같잖은 사과를 하면서도 속사포로 내뱉는 말들에서 승리의 쾌감을 느꼈다면,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확실히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수많은 수다를 떤다.
단톡 방의 모든 알림을 즉시 확인하여 무조건 코멘트를 단다. 논지와 상관이 없더라도, 매우 무의미한 수다가 될지라도, 그것이 나라는 사람이기에.
회사에서는 마음이 잘 맞는 직장 동료가 있어서 키보드 소리가 멈추지 않도록 채팅을 한다. 다른 동료들은 내가 쉬지 않고 일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겠지만 설마 이 정도의 수다를 떨고 있을 줄은 모르겠지.
심지어 나의 이력으로는 군대 상담 용사도 있다. 수다 자체를 좋아하기에 본격적인 상담 용사 집체 교육을 받고 군생활의 중 하반기는 상담 용사 마크를 달고 활동했다.
마음 아픈 이별 후에는 사람들과의 대화로 아픔을 달래다가 반년 후, 어느새 스무 명째의 연애 상담을 해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교회 청년부에 남아있기에는 눈치 보이는 나이가 되었지만, 새로운 사람들이 오면 도저히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밥을 사준다. 그리고는 이 글의 처음 등장했던 동생과 같이 몇 시간의 수다를 떨고야 만다.
나에게서 수다를 빼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입이 멈추는 순간, 혹은 손가락이 멈추는 순간 내 주위 사람들은 내 신변에 이상이 생기지 않았나 걱정할 정도로 나는 수다스러운 사람이다. 나답게 해주는 것을 말한다는 건 곧 나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과도 같을 텐데 이 서술하고 있는 자체로도 나답다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다.
나는 수다스러운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