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 드문 낮잠이었는데, 평생 잊지 못할 꿈을 꿨다.
늦게 잠들고 늦게 일어나는 백수생활 중에 아니지, 그냥 내 인생 중에 낮잠을 깊게 자는 일은 드물었다. 그날의 낮잠도 내게 있어 드문 낮잠이었는데, 평생 잊지 못할 꿈을 꿨다.
호주에서의 7개월 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6년 연애의 끝을 맺었다. 덕분에 뭔가 의욕이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지질하게 들리겠지만 이때의 실연은 그저 실연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장난감을 요구하지도, 맛난 걸 요구하지도, 옷이나 내게 주어졌으면 하는 모든 좋은 것들을 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본래 의욕이 없는 삶이었지만 이십 대 중반에 그녀를 만났고, 나는 조금씩 의욕을 찾기 시작했다. 제대로 차려입고 싶었고, 맛있는 걸 함께 먹고 싶어 했다. 현재를 넘어 미래까지도 끌고 와서 욕심을 부렸다. 나중에 여행을 하자는 둥, 이만큼 돈을 모아서 맛있는 걸 먹으며 놀자는 둥, 자격증 공부를 하자는 둥. 이렇게 찾은 의욕을 상실하는 경험이었다. 아예 갖지 않았던 것과 가졌던 것을 상실하는 경험은 많이 달랐다.
상실은 방황을 주고, 방황은 여유를 줬다. 나이로 보나 집안 경제사정을 보나 취업을 해야 하는 때였다. 그럼에도 나는 한동안 놀았다. 나에겐 방도 없어서 작은 거실에서 잤고, 아빠나 누나가 일하던 때는 덩달아 아침부터 깨야만 하는 신세였다. 그래서였나 보다. 내가 피곤했던 이유가. TV를 보든, SNS를 하든, 그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생각에 잠식이 되든 새벽에서야 잠들었다가 아침 일찍 깨는 것이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새벽에 잠들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한바탕 시끌벅적 요란하게 준비하던 사람들이 나가고 엄마랑 점심을 간단하게 먹었다. 점심식사 후에 엄마가 싱크대에서 설거지하는 모습을 보며 스르르 잠이 들었다. 평소에 자던 낮잠 시간은 10~15분 정도였다. 심지어 선잠이었다. 다만, 이날만큼은 꿈을 꿨다.
마치 드라마의 세트장 같다. 의식으로 있는 나는, 누워있는 나의 발 쪽에서 잠든 나를 보고 있다. -의식인 나와 꿈속에서 잠든 나는 언제든 합쳐지고 분리된다- 누워있는 나의 머리 쪽으로 쭉 가면 싱크대가 있어 엄마의 뒷모습이 보인다. 나와 엄마 사이 오른쪽으로 현관이 있다. 마침 현관에서 외부인이 들어온다. 나는 외부인의 검정 옷과 야구모자까지만 확인한 후 잠든 나와 시점이 합쳐진다. 의식은 깨어 있으나 몸은 잠든 상태다. 더 이상 외부인의 모습을 볼 수는 없다. 그가 근처까지 온 것을 인식하지만 몸은 깨어나질 않는다. 엄마는 아직 등 뒤의 상황을 모른다. 외부인은 품에서 부엌칼을 꺼내어 등 뒤에서 내 척추에 정확히 칼을 꽂는다. 그리고 조용하게 사라진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어째서 나를 찔렀는지, 내 삶이 어떠했는지 신기할 정도로 관심이 없다. 그저 '이렇게도 사람이 죽는구나'하고 나의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을 뿐이다. 평안하기까지 했다. 누운 채로 고개를 들어보니 엄마의 모습이 거꾸로 보인다. 신기할 정도로 모든 소리가 단절됐지만, 엄마의 콧노래가 들리는 듯했다. 순간 꿈을 자각했고, 엄마가 돌아보는 순간이 올까 봐 두려웠다. 두려움이 나를 깨웠다.
내게는 나의 죽음이 큰 이슈가 되지 못했지만 엄마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될 것이 자명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가장 큰 이슈가 내게 큰 두려움을 준다는 걸 깨달았다. 어째서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지를 역설적으로 깨닫는 시간이었다. 실연이 준 방황에서 유유자적하던 나는 이 역설의 깨달음 때문에 자세를 바로 잡고 나의 현 위치를 파악하게 됐다.
나의 삶은 늘 죽음 앞에서 되돌려 받는 삶이었다.
언제나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지만, 이렇듯 쉽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꿈이라고는 하지만 워낙 몰입이 되어서인지 현실적으로 닥친 일이라 생각했다. 현실로도 죽음을 맞닥뜨린 경험은 세 번 정도 있었는데 소름 돋게 같은 반응이었다.
처음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었다. 생활고에 시달린 아빠가 다 같이 죽자고 칼을 들었다. 엄마는 저항했고 누나는 펑펑 울기 바빴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도 죽는구나'하며 울지도 않았다.
두 번째는 군대에서 민간인의 신고로 매장된 탄을 수색하러 나갔을 때였다. 열 명 정도 되는 인원이 수색했고, 지뢰탐지기까지 사용했다. 탐지기에 신호가 잡혀 삽으로 땅을 팠다. 조심스레 팠지만 삽과 금속의 충돌음이 들렸을 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자칫 유탄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폭발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탄약 계원이었던 나는 그런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주마등이 흘렀다.
세 번째는 떡집에서 일하던 때였다. 추석 전 일주일 동안 총 여섯 시간 잤고 대부분 깨어서 끊임없이 일했다. 60톤가량의 떡을 만들고 들어 나르며 포장하고 판매했다. 마지막 날에 송편을 나르려 허리를 숙였다가 들어 올리는데 시야가 어두워졌다. 소리도 멀어졌다. 손에 들고 있는 무게감마저 희미해졌다. 들고 있던 송편을 놓쳤고 그대로 쓰러질 뻔했지만 주변에서 부축해줘서 의자에 기대앉았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단어가 어둠 속에서 찾아왔다.
그렇게 다가온 죽음들은 허망했다. 후회도, 아쉬움도 없었다. 마치 나이를 먹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생일을 축하하듯 죽음에 대해 인식한 날들을 기념할 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꿈을 꾸지 않는 날들이 지속됐다. 만일 꿈을 꾼다 하더라도 잊어버릴 만큼의 옅은 꿈들인지, 스스로 지워버리는 꿈들인지는 나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