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영혼이 안심하고 세상과 마주할 수 있기를."
지대넓얕 팟캐스트의 진행자이자 작가인 채사장의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에서 소년병 이야기를 다룬 부분이다.
인문학 분야에서 무섭게 떠오른 채사장 작가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그것이 타인과 맺는 친밀한 관계에 도움을 주는 것일까?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에 쓰인 작가의 바람을 보자.
"타인과의 관계는 나에게 가장 어려운 분야다. 단적으로 이야기하면 나는 내가 외부의 타인에게 닿을 수 있는지를 의심한다. 이 책은 가장 어려운 분야에 대한 탐구 결과이고, 고독한 무인도에서 허황된 기대와 함께 띄워 보내는 유리병 속의 편지다. 이것이 당신에게 가 닿기를."
자신을 관념론자라고 소개하는 작가는 모든 사람이 자폐아라고 말한다. 우리는 모든 감각기관을 통하여 세계를 재구성해서 받아들인다. 나만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느끼고 받아들이는 세계가 온전한 실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가? 내가 파랗다고 바라보는 세계가 다른 사람의 눈에도 동일한 파랑으로 보이겠는가? 아니라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내 안에서 재구성된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더 극단적으로 몰고 간다면 내 앞에 서있는 타인은 실재하는가? 과연 우리는 타인과 만나고 닿을 수 있는 것인가?
사실관계를 떠나 작가는 그렇다고 믿는다. 내 외부에 자의식을 가진 이가 있기를 바라고, 또 닿을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쓴다.
여기에 어느 소년병이 있다. 전쟁을 경험한 이 소년병은 현재 나그네가 되어 한 여인의 오두막 집에 이른다. 모든 나그네에게 해당하는 규칙은 이렇다. 여인의 집에 머무르다가 장작을 다 태우면 떠나는 것. 소년병과 여인도 이 규칙에 따라 동거를 시작한다.
작가는 만남에 대해 세계와 세계의 충돌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 이것이 사랑하는 이를 만난다는 행위의 진정한 의미다. 이제 그의 지평은 나의 지평으로 침투해 들어와서 결국 나의 세계와 겹쳐진다."
소년병은 여인의 생활 규칙들을 모조리 바꾼다. 성숙한 여인은 이 규칙들을 받아들이며 겨우내 함께 산다. 차츰 건강을 찾은 소년병은 여인의 세계에 한 발 더 들어가고자 한다. 그러나 다시 가을이 오고 환청이 들린다. 바깥을 응시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전쟁의 화포 소리가 소년병을 불안하게 만들고 쌀쌀해지는 날씨 속에서 건강을 잃어 간다. 여인은 소년병에게 필요한 것이 인내라고 생각했고 여인 역시 인내하며 기다렸지만 소년병은 이내 감기에 걸리고 만다. 소년병이 떠날까 불안한 여인은 장작을 전부 태우지 않고 적정량만 태웠다. 소년병은 장작을 많이 태우지 않은 여인을 원망하고 떠나게 된다.
여인이 성숙해진 것은 이러한 만남과 이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한 세계가 흘러들어와 세계의 확장을 경험했다. 그리고 이별을 통해 무너진 줄 알았던 세계가 무사하단 걸 알았다. 여인은 소년병에게 편지를 쓴다.
"한때는 서로에게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변해버린 모든 것이 아직도 마주하기 어렵습니다. 힘든 삶에서 위로가 되고, 휴식이 되는 사람이었던 때를 생각합니다. 함께 걷던 언덕과 따뜻한 벽난로와 밤을 새웠던 이야기들을 기억합니다. 이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 더 이상 나에게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항상, 언제나 같이 걸을 것이라 혼자 생각했던 시간이 슬픕니다. 그럼에도 힘든 순간들이 끝나고 계속 걸을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감사합니다. 당신의 불안이 사라지고,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만나길 바랍니다.
소년병은 떠나고서야 깨닫는다. 내가 정착해야 할 모든 이유가 그녀에게 있었음을. 그리고 그것이 두려웠음을. 소년병과 여인의 이야기는 더 이어진다. 빙글빙글 도는 것 같으면서도 더 아름다워지고 더 슬퍼진다. 더디지만 분명하게 세계는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나는 새로운 세상과 마주할 때마다 불안해하고 더딘 발걸음을 내딛는다. 여인의 말처럼 안심하고 세상과 마주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여전히 불안하다. 그러나 불안해도 분명히 내딛는다. 내게 있어 가장 크고 힘들었던 세상은 연인과 이별한 세상이었다. 세계가 무한히 확장하는 것을 경험하다가 뚝 끊겨 버렸다. 이윽고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달 동안 머뭇거리며 그 세계에 들어가기를 꺼렸다. 하지만 분명하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고개를 돌려 외면하던 세상을 마주했다. 그리고는 똑똑히 알게 됐다. 확장하다가 뚝 끊겨버린 것이 아녔다. 연애의 세계가 사라진 게 아녔다. 여전히 그녀가 남긴 세계가 존재했고, 그 위에 그녀가 부재한 세계도 펼쳐졌다.
"그의 세계는 나의 세계 위에 온전히 남는다. 나의 세계는 넓어지고 두터워지며, 그렇게 나는 성숙해간다.
... 가끔 다시 힘들겠지만, 그의 손을 잡고 세계의 중심이 되었던 기억이 우리를 보호할 테니까.
... 나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 그리고 몇 번의 겨울과 몇 날의 밤을 보내고 다시 봄이 찾아온 어느 맑은 날, 우리는 또다시 운명처럼 새로운 세계를 조우하게 될 것이다."
불안한 영혼이 안심하고 세상과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