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을 읽으면 눈물이 났다. 그 눈물은 그 글에 대한 감동일 수도 있었고, 그 작가에 대한 선망과 질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눈물의 의미는 그 작가의 그것보다 더 잘 쓸 수가 없다는 비참한 인정이었다.
글을 잘 쓰고 싶었다. 잘 쓸 수가 없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잘 쓸 수 없을까 봐 항상 두려웠고 한편으로는 쓰고 싶어서 조바심도 났다. 그래서 지금은 참 많은 핑계를 대고 있다. 회사일이 바빠서, 아이와 놀아줘야 해서, 집안일도 해야 해서, 날씨가 좋으니깐 가족들과 놀러 나가야 해서, 글 좀 써볼까 했더니 오늘은 화장실이 엉망이네... 청소나 해야겠다.
타협은 꿈에 핑계를 보탤 수 있게 하는 참 편한 수단이 되었다.
적성에도 맞지 않는 직장 생활을 계속한다는 것은 비겁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겨우 삶에 안정기가 찾아왔기도 했고, 인생의 절반을 살아온 이 시점에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했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해야 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되었다. 마흔 전까지 책 한권만이라도 출판해 보자, 그리고 계속 도전할지 말지는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보자.
중요한 어떤 선을 넘어 버린 것 같은 결심을 한 후, 노트북과 다이어리엔 쓰다 만 습작들이 다시 쌓여만 갔다. 완성되지 못한 습작들에 제목을 달 때마다 글 쓰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던 지난 과거들이 떠올라 두려웠다. 또 완성해보지 못하고 실패하는 것은 아닌가.. 희망을 품은 바람은 뭉개질 듯 위태로웠다.
글을 쓰는 것을 그만두었던 적은 많았다. 글 쓰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면, 꼭 한 마디씩 던지며 지나갔고 그 말들은 여지없이 족쇄처럼 발목을 감아왔다.
20대, 대학교 졸업반이었을 때였다. 작가가 되면 어떨까라고 친구들에게 고백 같은 질문을 했었다. 다른 친구들보다 늦은 시기에 취업 준비를 시작한 녀석이 갑자기 작가가 되고 싶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을 것이다. 친구들은 걱정을 재채기처럼 숨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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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보다 조금 잘 쓰는 것은 알지. 근데 그걸로 되겠나?”
“돈 벌어먹을 수 있겠나? 그냥 취미로 하지”
"작!가튼 소리를 하노"
그렇지 않아도 남들보다 늦었는데. 작가가 되든, 직장인이 되든,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 불안했고 두려웠다. 그리고 어차피 사회는 ‘얄짤’ 없는 곳이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도전과 포기를 반복해 오던 늦은 밤. 나는 오늘도 가족들이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부엌 테이블에 노트를 펴고 앉는다. 오늘 밤도 어제처럼, 펜을 들었다, 놓았다, 주저한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집착,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손에 쥐어진 펜이 망설이며 자꾸만 검은 점들을 찍었고 실패라는 말줄임표를 남겼다. 밤의 어두움 속에서 나는,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리는 새벽처럼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