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장편 - #11 (제3장 그림자)
<#10에 이어서...>
순간적으로 벌어진 헤프닝에 J 부서장은 자리에 털썩 앉더니“아이, 새끼 술버릇 참 거지 같네.”라며 남은 술잔을 입에 털어 넣고 있었다.
나머지 직원들은 팬티만 달랑 걸친 모습으로 마치 단체로 사우나탕에 들어온 것처럼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소파에 지친 몸을 맡겼다.
J 부서장은 나를 조용히 자기 곁으로 불렀다.
그리고 이내 난감한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 아줌마 있잖아. 알아서 내보내.”
그 아줌마라고 칭한 그녀는 이 광란의 회식 자리를 먼저 떠난 아까 그녀였다.
그녀는 둘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곧 출산 휴가를 준비 중이었던 참이었다.
인사이동 시즌에 다른 부서에서 우리 부서로 이동해 왔었는데 타 부서에서 그녀의 활용가치를 찾지 못하다가 인사팀에서 우리 부서로 배치를 해놓은 것은 J 부서장의 입김 때문이었다.
그가 그녀를 면담했을 때 둘째 임신계획을 듣지 못하였다고 말했다.
집중도 높은 업무에 여성 특유의 꼼꼼함을 기대하며 그녀를 배치해 놓았지만,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출산을 이유로 육아휴직을 하겠다는 말을 듣고는 J 부서장의 기분이 매우 상한 것이다.
그가 그녀를 겉으로 축하는 해주었지만 실상 그녀에 대한 속마음은 나에게 퍼부은 그녀에 대한 험담이 진심이었다.
“뭐 그런 미친년이 다 있어. 갈데없어 내가 받아 주었건만 들어오자마자 출산에 육아휴직까지 떠나버리겠다니 이거 원! 제정신이야?
아니 그럴 거면 애초부터 말을 했었어야지. 인제 와서 원래 계획이 없었는데, 어쨌는데, 뭐 이따위로 둘러대면서 횡설수설하는데 답답하더구먼.”
“저……. 그래도 법으로 정해진 휴직을 하였다는 사유로 자른다는 게…….”
“아, 이런 말귀를 못 알아듣기는. 나중에 복직할 시점에 지가 선택할 수 있게끔 적당히 둘러대란 말이야.
우린 어차피 대체인력 앉혀놓을 건데. 자기 자리가 있어야 여기 다시 올 것 아냐. 자기 자리 없다는 걸 스스로 인지하게 만들라고. 하루 이틀, 한두 달도 아니고 뭘 어쩌겠다는 거야. 그렇게 오래 공석으로!”
나는 더이상 대꾸할 수 없었다.
나 역시 1차 인사권자로서 조직 내에서 그녀에 대한 활용도를 심각하게 고민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직원의 긴 휴직 사유가 아무리 법적으로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이윤을 추구해야 하는 조직의 입장에서는 그냥 놀고먹는 직원으로밖에는 볼 수 없다.
내가 첫 직장생활을 하던 신입사원 시절 공휴일을 끼고 총 열흘간의 휴가를 신청하여 얼마간 사무실을 떠나는 나에게 나의 직속 상사는 잘 갔다 오라는 인사말 대신‘선배는 회사에서 죽도록 일하는데 아주 그냥 시원하게 놀러 가시는군요’라는 가시 박힌 농담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의 말이 진심이 아닌 농담으로 한 말일 것이라고 그렇게 치부하며 이상하게 기분 나쁜 감정을 애써 스스로 치유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직원들의 휴가를 복지라는 허울 좋은 시스템 안에 가두어 놓고는 회사가 마치 선심 쓰듯 활용하는 행태를 지금껏 몇 차례의 이직을 경험하면서 어느 직장이나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더욱이 출산과 육아를 병행해야만 하는 여직원들에게 장기 휴가는 더욱 눈치가 가기 마련이었다.
“하여간 여자들은 조직에 도움이 안 됩니다! 거짓말이나 살살하고. 왜 하필 바쁜 우리 부서에 오기 전에 임신해서는! 누가 임신하지 말래요? 좋다 이겁니다. 근데 부서장님께 사실대로 말을 했었어야지요.
여기 오기 전에. 임신했다. 그러니 길게 휴직할 수 있다. 이렇게 말했어야지요. 오자마자 가버리면 하던 일은 누가 하라고. 게다가 기독교라고 술도 못 마셔요. 뭐 이런 예수쟁이가 우리 실엘 와 갖꼬 회식 분위기만 흐려놓고. 근데 여직원이 우리 실에 있긴 있어야 해요. 잔일을 내가 너무 많이 해. 이 짬밥에. 조직개편이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니 계약직이라도 일단 뽑아주세요. 여직원으로. 기왕이면 예쁜 애로…….”
어느새 Y가 J 부서장 옆에 와 앉아서 반쯤 풀린 눈과 비틀거리는 몸으로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인마, 너는 술버릇부터 고쳐. 하마터면 여기 홀랑 다 태워 먹을 뻔했잖아!”
“네, 네, 죄송함돠. 오늘 제대로 불 쑈 한번 보여드렸어야 했는데. 저, 저, 실장 놈이 말리는 바람에…….”
J 부서장의 질책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그가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탁자 위로 고꾸라졌다.
그렇게 광란의 회식 자리가 어느덧 마무리되었는데, 그날 한 사람이 슬며시 중간에 사라졌었다.
그가 바로 K 박사였다.
언제 그 방안에서 나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다음날 출근해서 그를 붙잡고 물어보니 속이 안 좋아서 먼저 귀가를 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난처한 상황을 피하기 위한 그만의 단순한 핑계였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알기까지는 몇 차례의 회식이 더 진행되고 난 다음이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회식 자리를 피하면서 직원들과의 교류가 많지 않았다.
J 부서장의 취기가 잔뜩 오르기라도 하면 속옷 바람에 춤추며 노래 부르기가 이후로도 몇 차례 계속되었지만 단 한 번도 그 자리에 K 박사는 함께하지 못하였다.
옷 벗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그 시점이 되면 그는 소리 없이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갔고 다들 고주망태가 된 상태에서 없어진 그를 아무도 신경 쓰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진탕 놀고먹고 마시고 한 다음 날의 조직 분위기는 내 기억으로 전혀 나쁘지 않았다.
같은 남자들끼리 전날 밤 허물없이 다 벗고 놀았다는 그 이상하고도 은밀한 유대감은 서로를 어느덧 견고한 끈처럼 엮어버렸던 것이고 그 안에서 오로지 K 박사의 그림자만이 실체 없는 유령처럼 떠돌고 있어야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