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때려치우세요

- 경장편 - #12 (제4장 갑질)

by Johann

<#11에 이어서...>


4. 갑질


그날 아침 2박 3일 지방 출장을 마치고 출근한 Y 실장이 신경질적으로 K 박사를 자기 자리로 부른 이유는 그 전날 밤 J 부서장에게 잔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J 부서장이 화가 난 이유는 본부장에게 보고해야 할 보고자료가 자신이 요구했던 시간에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보고자료 책임작성자가 바로 K였었다.

J 부서장이 본부장을 대동하고 업무적으로 중요한 외부인사들을 만나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K가 작성한 사업 기획서가 필요했었는데 첨부 자료가 미비하여 J 부서장이 차마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였던 모양이다.


사실 그 기획서 작성 건은 정작 우리의 주요 업무와는 조금은 무관한 일로서 순전히 J 부서장이 본부장에게 큰 점수를 따기 위해 직원에게 추가로 일을 시켰던 건이었다. J 부서장은 그동안 임원으로의 승진기회를 못 잡은 채 그렇게 나이를 먹으며 결국 정년퇴직을 이제 얼마 안 남겨두게 되었다.


그가 정년까지 버틸 정도로 회사에서 건재할 수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지금의 본부장과 호흡이 너무 잘 맞았기 때문이다. 본부장의 부족함을 J 부서장이 오른팔의 역할로 보완을 잘해주다 보니 직원들 간에는 J 부서장을 호칭할 때 본부장의 비서실장이라는 은어로 비실이라고 불렀다.

개중 몇몇 직원들은 딸랑거리며 아부를 잘한다는 뜻의 의성어를 사용하여 딸랑이라고도 부르곤 하였다.

이런 그였지만 지난 본부장과의 사이는 매우 안 좋았다.


당시에 직원들은 그가 임원인사에 번번이 탈락하고 나이는 먹어가는데 본부장과의 마찰이 빈번하여지자 그의 회사 생활이 그리 길지 못할 것으로 생각을 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경영악화의 책임을 물어 본부장이 먼저 회사에서 나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J 부서장과 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지금의 본부장이 상무에서 전무로 승진하면서 퇴사위기 일로에 있던 J 부서장이 다시 살아난 것이었다.


본부장은 그를 임원에 준하는 사실상의 임원 대우를 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J 부서장이 본부장에게 틈만 나면 잘 보일 기회를 만들어 내고자 애를 쓰고 있었다.

전날 저녁 J 부서장이 회사 일로 본부장과 외부인사들을 만났던 자리도 그런 맥락이었다.


그가 사업 기획서를 가지고 본부장에게 점수를 딸 수 있었던 매우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핵심자료가 누락 되어 얘기조차 꺼내 보지 못한 것이었다.

J 부서장은 어제저녁 모임이 있기 전까지 틈만 나면 우리 실로 찾아와 K와 Y 실장을 다그쳤었다.

K는 기획서를 작성하며 몇 날 며칠 J 부서장에게 수차례 중간보고하였다. 그때마다 보완에 보완을 여러 번 하였으며 어제까지 완료됐어야만 했다.


그런데 J 부서장은 어찌 된 일인지 미완성된 기획서를 받았고 그날 저녁을 겸한 술자리가 파하자마자 Y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잔뜩 취한 목소리로 제대로 일 처리 못 하냐며 한소리를 했던 모양이다.

그것이 Y 실장이 아침 출근부터 기분이 상해있었던 이유였다.

그리고 출근하자마자 기획서 작성 담당자인 K를 불러 화풀이를 하려는 태세였다.


“어제 오후 전화로 나에게 했던 말 하고 왜 틀린 건데?

업체로부터 자료를 즉시 넘겨받고 나서 그 완료된 기획서를 부서장 이메일로 곧바로 보낼 거라고 나한테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잖아.

근데 그 중요한 자료가 왜 누락이 되었냐고!”


Y 실장이 내지르는 고성이 조용했던 사무실 안에 벼락 치듯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담당자가 약속한 시각에 반드시 보내 주겠다고 분명히 말했었거든요. 근데…….”


K가 기어들어 가는 개미 목소리로 대답하는 도중에 Y 실장은 그의 말을 끊어버리고 냅다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이 씨, 야! 그러니까 내가 누누이 얘기했었잖아. 협력사 놈들은 무조건 계속 쪼아대어야 한다고!

왜 멍청하게 그걸 마냥 그놈들이 편한 시간에 주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냐고!

업체 가서라도 강하게 말을 했었어야지!

그 새끼들 지금 자르지도 못하고 말이야. 본부장이 키워 놓은 업체라 자기들도 그걸 잘 알아. 우리가 자기들을 어찌 못한다는 걸. 그걸 악용해서 을인 주제에 갑인 우리를 우습게 보는 거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더 강하게 나가야 하는 거야. 우리가 원하는 걸 제때 얻으려면 그냥 매일같이 그놈들을 닦달하고 쪼아대어야 하는 거라고!

너가 그걸 잘 안 하니까 자꾸 이런 사달이 벌어지는 거 아냐!”


K가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Y 실장이 쉴 새 없이 내지르는 독설을 고개만 푹 떨군 채 묵묵하게 듣고 있었다. 언뜻 보면 K가 일방적으로 업체를 잘못 다루어 일이 잘못된 듯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것이 주된 사유는 분명 아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나는 며칠 전 사무실 내 통화 방음 부스에서 통화하다가 우연히 옆 칸에서 K가 업체 관계자와 격한 통화를 하는 것을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다.

방음시설이 잘 갖추어진 개인 전화 부스였지만 그가 어찌나 화를 내며 큰소리로 격하게 통화를 했던지 방음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던 나에게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더구나 그토록 얌전하고 순진해 보였던 K 박사의 입에서 상당히 거친 표현과 말이 쏟아져 나온 것을 그날 나는 처음 들었던지라 적잖이 놀랬던 게 사실이다.


“그러니까 일할 사람이 없으면 인원보강을 하시라고요, 제발!

그리고 무슨 납품기일을 협의 없이 적게 드렸다고 그러는데요?

협의가 왜 필요해?

이런 간단한 일 사람만 많으면 금세 다 해.

그쪽 업체 문제를 왜 우리한테 뭐라 하는데.

그리고 지금 누군 혼자 일 안 합니까?

나도 혼자 일 다 처리해요.

그게 핑계가 될 수 없어요!”


“아니, 뭐가 핑계가 아닙니까?

이건 능력의 문제예요.

거기도 사실 우리 본부장이 잘 봐줘서 지금까지 우리랑 일할 수 있던 거였지 이런 식으로 일을 하는데 어디서 뭘 하겠어요?

안 그래요?

본인 능력이 안 되면 다른 사람에게 맡겼어야지요.

인제 와서 인원 부족 핑계 대면서 제시간에 납품 못 하겠다 그러면 뭘 어쩌라는 건데?”

“뭐?

씨발?

지금 나한테 욕했냐?”


“혼자 지껄인 건 욕이 아니냐? 새끼야!”


나는 맞은편 부스에서 나누는 대화가 점점 거칠어져 가고 있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어느 순간 그들의 통화에 약간의 긴 공백이 발생했다.

K가 상대방의 변명을 듣기만 하는 듯 아주 작은 소리만이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k가 내던진 말은 내 귀를 의심케 했다.


“그냥 때려치우세요. 이따위로 계속 일할 거면 다른 일자릴 찾아보던가!

암튼 나는 낼 오전까지 요청한 자료를 다 만들어서 반드시 보낸다는 거로 알고 있겠습니다.”


때려치우라는 말과 다른 일 알아보라는 말은 Y 실장이 부하 직원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 섞어가면서 늘 입에 달고 다녔던 말이기도 했다.


그가 통화 방음 부스에서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잠시 뜸을 들인 후 내가 조심스럽게 나왔다.

그는 아직 자신의 자리로 가지를 않은 채 뭔가 상당히 초조해 보이는 듯한 자세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나는 짐짓 모른 체하며 말을 건넸다.


“지난해 말부터 본부장이 개인적으로 시킨 일로 아주 바쁘지?”


“뭐, 그냥…….”


그가 말끝을 흐리면서 나를 피하려는 눈치를 느낄 수 있었다.

거기에서 대화를 그만두었어야 했는데 내가 불필요하게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내가 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


“그냥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도와주시다가 괜히 지난번처럼 강제적으로 최종 서명하시면 어떡해요.”


그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농담인 것처럼 말은 했지만, 분명히 그의 말 속에는 가시가 숨겨져 있었다.


내가 실장으로 있었을 때 전략과제 형식의 장기 프로젝트를 K에게 맡긴 적이 있었다.

J 부서장이 본부장에게 보고하고 다시 CEO에게까지 최종 보고가 되어야 할 미래전략과제로서 상당히 비중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내 뒤를 이어 Y가 실장이 되고 난 뒤에도 K의 프로젝트는 계속 이어졌고 드디어 부서장에게 최종 보고가 이루어지게 됐다.

하지만 부서장에게 최종보고서가 올라가기 전까지 그동안 여러 차례 보고서가 수정되었는데 더이상 추가보완이 불가한 상황이었음에도 부서장의 수정요구는 계속되었다.


이러한 일이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었다.

J 부서장에게 무언가를 보고하러 갔을 때 단 한 번만으로 그의 승낙을 받아내는 경우는 어느 직원도 없었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로젝트 담당자였던 K와 함께 보고서를 들고 J 부서장에게 여러 차례 정기적으로 중간보고를 하였는데 결국은 해를 넘기면서까지 수정과 보완을 거듭 거치면서 보고가 진행되었고 내 뒤를 이은 Y 실장이 K와 함께 J 부서장에게 중간보고를 계속하였다.


사실상 K의 완성된 보고서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누가 만들어도 그 이상 더 잘 만들 수가 없을 정도였다. 최종보고서를 끝내놓고 일부러 다른 부서와도 협업하여 보고서의 품질을 객관적으로 검토받았는데 하나같이 훌륭하다는 칭찬 일색이었다.

하지만 그 최종보고서는 어찌 된 일인지 J 부서장 앞에서는 늘 중간 보고서가 돼버렸다.


“아, 진짜 짜증 더럽게 나네. 뭘 더 하란 얘기야!”


K와 함께 최종보고서를 들고 J 부서장을 만나고 나온 Y 실장이 격한 말과 몸짓으로 화를 연신 내고 있었다.

나 역시 그 최종보고서를 검토용으로 회람했을 때 그야말로 나무랄 데 없이 매우 훌륭한 보고서라 느꼈다.

반년간 오직 그 보고서에만 매달린 K의 노력에 대한 흔적이 보고서 곳곳에 너무나도 여실히 잘 나타나 있었다. 나는 짜증을 내는 Y 실장에게 다가가 뭐가 문제인지 물어보았다.


그런데 그 역시 뭐가 문제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디가 잘못되었고 무엇을 더 추가 보완하라는 그 어떠한 주문도 없다는 것이다.

그냥 전반적으로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이라는 것이 J 본부장의 코맨트 였다는 것이다.


“아이 썅, 무슨 일을 느낌으로 하냐고. 그냥 느낌이 팍 안 온대. 그게 다야.”


Y 실장의 신경질적인 말에 나는 차분하게 K의 최종보고서를 다시 훑어보았다.

검토용으로 모든 직원에게 회람하게 했던 그 보고서랑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그러네. 이 이상 더 어디를 손봐야 하지?”


나의 말에 Y 실장은 체념한 듯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어대며 말을 이어갔다.


“스트레스받아서 더이상 나는 보고 자리 못 들어가겠다. 실무자들이 다 좋다고 한 것을 자기가 뭐라고 느낌이 안 온다는 거야?

그냥 우리는 다 자기 밑에 떨거지라고 생각하는 거야. 우린 멍청하고 자기만 똑똑하다 믿는 건지. 자기 생각을 왜 그리 못 따라오냐는 건데, 그럼 따라올 수 있게 설명이라도 잘해주던가. 이도 저도 아니고. 한두 번 그런 게 아니지만 참 적응 안 된다.”


투덜거리는 그의 말을 뒤로하고 내가 보고서를 한 번 더 검토해보겠다며 내 자리로 왔다.


“시간 끌지 말고 당장 보완해서 바로 다시 갖고 오랬어!”


Y 실장이 앉아서 손을 뻗어 기지개를 켜면서 그렇게 소리를 내질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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