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장편 - #13 (제4장 갑질)
<#12에 이어서...>
J 부서장이 즉시 보완해서 갖고 오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봐서는 내용 자체를 손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아무래도 내용 자체를 건드리기엔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했고, 사실상 추가보완 할 내용이 더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단지 시각적 효과였다.
보고자가 흔하게 하는 실수 중 하나가 자기 위주로 보고 양식을 만들고 자기 보기 좋게 보고 형식을 갖추어 진행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고서는 무조건 보고 받는 자 위주로 구성이 되어야만 한다.
보고를 받는 사람에 따라 띄어쓰기와 오탈자에 민감하다 못 해 심지어 쉼표와 마침표 따옴표까지 까탈스럽게 따지는 약간은 정신적으로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예민한 자들이 의외로 많다.
그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그들에겐 엄청 중요한 것일 수 있다.
내용이 중요하지 그런 것이 왜 중요한 것인지 그들에게 따져 물어도 얘기가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 보고받는 자라고 하는 상급자의 위치에서 어떠한 보고서를 단 한 두 번에 승인한다면 왠지 보고받는 사람의 권위가 안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간혹 있다.
그래서 일부러 몇 차례 쓸데없이 추가보완을 지시하는 일도 더러 왕왕 있기도 하지만 J 부서장의 경우는 그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다 싶었다.
정해진 보고 양식의 틀 속에서 나는 오로지 글자의 포인트와 자간 등을 약간씩 조정했고 각각의 이미지 크기들을 조금씩만 변경했다.
그렇게 간단 작업을 하고 나니 30~40여 분 정도 소요된 것 같았다.
Y 실장은 농담처럼 내가 한번 J 부서장에게 보고를 갔다 오면 어떻겠냐고 말하였다.
K 또한 흔쾌히 수락했다.
누가 가더라도 자신의 보고서를 부서장은 절대 승인을 안 해줄 것이라 장담하며 거의 낙담을 하고 있었다.
나는 Y 실장과 함께 J 부서장에게 갔고 내가 수정한 보고서를 내밀었다.
사실 누가 보아도 기존의 보고서와 별반 차이 나는 것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다지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나와 Y 실장이 약간의 긴장을 안고 보고서를 다시 검토 중인 J 부서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이제 됐다. 여기서 바로 서명해라. 지금 본부장에게 보고하러 가야겠다.”
J 부서장의 뜻밖의 말에 Y 실장이 적잖이 놀랐고 누구의 서명을 받으라는 건지 되물었다.
“실무자들 너희들 서명 빨리하라고. 내가 최종 서명할 테니까.”
“부서장님! 서명은 제가 할 사안이 아니라 실무담당자인 K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의 대답에 Y 실장도 그래야 할 것 같다고 동의하였다.
하지만 J 부서장은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며 오히려 역정이었다.
“아이, 진짜 바쁜데 별걸 다 갖고 그래. 누가 했던 뭔 상관이야. 너도 어차피 지난해부터 K랑 같이 해왔잖아.
Y보다 더 오래 했었구먼. 엉뚱한 사람이 서명하는 것도 아니고. 빨리 각자들 해. 본부장 또 외부일정 있는 것 같은데 나가기 전에 지금 당장 보고하러 들어가게.”
J 부서장의 다그침에 나와 Y 실장은 얼떨결에 최종보고서에 서명해야 했다.
Y 실장은 중간 승인자로서 당연히 최종 서명을 해야 할 자격과 의무가 동시에 있었지만,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아니하였다.
보고서 작성자였던 K가 최종 서명을 해야 하는 게 옳았다.
더군다나 이번 프로젝트 경우 사내 문서보관 규정에 따라 10년 장기 보존에 해당하였다.
그만큼 회사 내 상당히 중요한 문서였으며 그렇게 오래 보존이 된다는 것은 그 업무를 행한 담당자의 노력과 수고가 회사 내에서 좋은 성과로 기록되기도 하면서 공식적인 모든 문서작성에는 저작권이 있듯이 그만큼 문건 작성자에 대한 보호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안이었으므로 서명을 그리 쉽게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J 부서장의 성화에 못 이겨 나는 K가 해야 할 서명을 내가 급히 해버렸고 결국 내 이름으로 본부장과 CEO에게까지 보고가 이루어지고 말았다.
최종보고서에 단지 글자 크기 조정과 자간 조정 정도 하고 결국 승인을 받았다는 말을 들은 K의 표정이 황당해하는 그 이상이었다.
더구나 그 대신 서명을 해야 했던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차분히 설명해주었으나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허탈해하는 그의 불편한 표정은 이후로도 오래도록 풀리지 않았다.
특히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내가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쌀쌀맞았다.
나 역시 몇 달씩 열심히 일해온 직원의 업무성과를 내가 한순간 가로챈 것 같은 찜찜한 기분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 둘 사이의 냉랭한 여파가 그의 전화통화를 우연히 엿듣게 된 그 날까지도 지속이 되었던 거다.
K 앞에서 Y 실장의 잔소리와 역정은 계속해서 그칠 줄 몰랐다.
“내가 볼 때 넌 너무 샤이(shy)한 것 같아. 그래서 어떻게 여기서 일하겠어?
외부업체랑 거래해가며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당신처럼 그렇게 좋게좋게 해주니까 애들이 다 말을 안 듣는 거야!
좀 조질 땐 제대로 조져버리라고!
그놈들은 가만히 좋은 말로 해선 절대 안 돼. 좀, 제발 팍팍 조져.
그놈들 말 들어 처먹을 때까지 계속 닦달하고 쪼아대란 말이야!
자꾸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만 편하게 대해 주니까 그놈들이 갑인 우리를 제대로 못 알아보는 거잖아!”
K는 계속해서 말이 없었다.
내가 어제 그의 전화통화를 엿들었을 때와는 달리 그는 완전히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K의 입장에선 충분히 억울할 것도 같은 상황이다. 그러나 그는 Y가 쏟아내는 거친 말들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으며 자신의 구두코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 대화의 중간에 끼어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 어떠한 변명조차 하지 않는 K를 대신하여 내가 항변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냥 가만히 지금의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계속해서 화를 풀지 못한 Y 실장이 급기야 선을 넘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 이 내용만 봐도 그래. 이게 도대체 어딜 봐서 박사가 작성한 내용이냐고. 박사 맞아?
아니, 당신 박사라며?
학사인 나도 이 정돈 해!
그럼 당신은 더 잘해야 하는 거 아냐?
박사학위 논문이 뭐였지?
그것 좀 보자. 내일 좀 갖고 와봐!”
“아우, 저 인간 또 시작이네. 이 상황에서 남의 논문 얘기가 왜 나와. 지가 보면 뭐 아나?
별 거지 같은. 어이구. 저걸 실장이라고 앉혀놓은 J 부서장이 더 문제야. 그렇지 형!”
어느새 후배 H가 와서는 나지막이 속삭이듯 나에게 말을 건네왔다.
“아니 지난번에 소원 수리 다 받아 놓고 또 저 지랄이네. 저거 완전히 직원들 앞에서 망신 주는 거잖아.
저 짓거리 하지 좀 말라고 직원들이 그렇게 말들을 했건만.
하여튼 하는 짓 보면 J 부서장 판박이야. 완전 똑같아.”
그는 나에게 무슨 답변을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다.
아침부터 사무실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드는 Y 실장에 대해 답답함을 혼자 토로한 것이다.
직원들이 Y 실장에게 있어서 가장 싫어했던 점이 바로 모든 직원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실수와 잘못 등을 지적하고 화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Y가 실장이 되기 전부터도 그는 후배 직원들의 잘못을 지적할 때 매우 직설적이었다.
조용하게 회의실 같은 곳에서 단둘이 문제를 의논하며 부하 직원이 잘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선배로서 멘토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보다는 단지 직원들의 실수에 대해 자신의 싫은 감정을 어디에서건 가리지 않고 그대로 직설적으로 표출해 버렸다.
그러다 보니 대다수 직원이 이러한 그의 언행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렇듯 타인의 인격을 무시하고 배려하는 마음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고 오로지 권위의식만이 강하였던 Y가 실장이 되면서부터 이런 그의 행동들이 유달리 더 빈번해 졌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모습에 조직원들은 자신들의 어떤 실수와 잘못에 대하여 인사권한을 갖고 있던 조직장이 개개인의 성향과 업무능력을 고려하면서 보다 건설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개선의 기회를 주려는 목적보다는 단순히 망신 주기를 통한 체벌에만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라고 다들 생각하였다.
Y 실장 자신도 만약 조직원들에 대한 배려심을 조금이라도 보이게 되면 훈계의 효과가 경감 된다고 믿었는지 아니면 타인의 인격을 말살하면서까지 인사권자로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더욱 부각하고 싶어서 그랬는지 어쨌든 그는 항상 모든 직원이 보는 앞에서 부하 직원들을 거침없이 훈계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고, 이를 즐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특히 지금 K에게 하는 말처럼 상대방의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듯한 발언은 그의 전매특허라고 할 만큼 정말 얄밉고 한 대 패주고 싶을 만큼 능수능란하였다.
이날 아침 Y 실장의 투덜거림과 독설은 J 부서장이 Y 실장과 K를 호출하고 나서야 끝이 날 수 있었다.
그날 온종일 K는 보고서 첨부 자료 외주를 맡긴 협력업체 담당 직원에게 전화 연락을 취했지만, 그와의 연락이 전혀 닿지를 아니하였고 결국 답답함을 못 이긴 Y 실장이 그날 오후 늦게 K를 대동하고 협력업체 대표를 만나러 사무실을 나갔다.
그리고 그날은 공교롭게도 우리 실 전체 회식이 있는 날이었고 퇴근 이후 회식 장소에서 다 같이 만나기로 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