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장편 - #14 (제4장 갑질)
<#13에 이어서...>
그날 저녁, 회식이라면 질색을 하던 K가 Y 실장과 먼저 회식 장소에 와 있었다.
Y에게 억지로 끌려온 티가 역력히 엿보였다.
이미 먼저 와 있으면서 벌써 한 병의 술을 Y 실장 혼자 거의 다 비우고 있었다.
내가 Y 실장 맞은 편에 자리를 잡자마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하듯이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 새끼 아무래도 잠수탄 것 같아. 오늘 무단결근했다더군. 무책임한 자식!
아무도 그 새끼 행방을 모른다는 거야. 대표가 납품기일 못 지켜서 말로는 미안하다고는 하는데, 미친, 그래놓고 자기네들 인원 부족 핑계를 자꾸 대길래 그럼 빨리빨리 인원충원 안 하고 그동안 뭐 했냐고 한소리 했다가 내정간섭 아니냐는 말까지 듣고 왔다.”
“뭐가 내정간섭인데?”
“몰라 나도. 미친 새끼들이지. 우리 본부장 빽만 믿고 저 지랄들인데. 아주 자기들이 갑인 줄 안다니까.
내일 J 부서장한테 그대로 보고해버릴 거야. 우리 본부장이야 J 부서장이 하는 말이라면 자다가도 뻘떡 일어나는 양반일 텐데 이참에 저것들 잘라버리라고 해야지. 안되면 반드시 페널티라도 물릴 거야!”
말이 끝나자마자 그가 다시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옆에 앉은 K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또다시 술을 권하기 시작하였다.
“우리 K 박사님이 오늘 아침부터 나한테 싫은 소리 엄청나게 들었는데 다 잊으쇼. 서로 일하면서 쌓인 감정은 원래 이렇게 다 술로 푸는 거야. 근데 얘는 그게 통 안돼. 뭘 마시는 시늉이라도 해야 우리가 뭘 좀 풀어나갈 거 아냐. 야, 막내야! 너 나가서 무알코올 맥주 하나 사 와라!”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막내 사원에게 자신의 개인 결제 카드를 건네주었다.
막내 사원은 Y의 개인카드를 받아들고 총알같이 튀어 나가더니 얼마 안 있어 무알코올 맥주를 사서 돌아왔고, 본격적으로 술판이 벌어졌다.
직원들은 또다시 알코올로 업무에 쌓인 스트레스를 청소라도 하듯 서로 앞다투어가며 술을 몸 안에 쏟아붓고 있었다.
이미 꽤 취기가 오른 Y 실장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가 커진다는 것은 그가 상당히 취한 상태라는 것을 반증하는 일이었다.
그의 옆자리에서 억지로 무알코올 맥주를 모두 다 마시고 빈 잔을 앞에 두고 있던 K를 향해 Y 실장이 또다시 트집을 잡기라도 하려는 듯 말을 건네기 시작하였다.
“야, 좀 마셔라.
어? 잔이 비었네.
진작 말을 했어야지.
이리 줘봐!”
그가 자신의 술잔을 비우더니 닦지도 않은 그의 술잔 안에 술을 한가득 채웠다.
그리고는 K 앞에 놓고 마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술잔 받은 사람 어디 갔나?
술잔이 다시 와야 내가 술을 먹을 거 아냐!”
K는 미동조차 하지 아니하였다.
Y는 꽤 취하여 몸이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며 K가 자신의 술잔을 비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수분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고도 무거운 침묵을 깨고 싶었다.
“K 박사가 술 못 마시는 것 이미 다 아는 사실이잖아. 그만 강요해!”
아까부터 고개를 숙이고 있던 Y 실장이 내 말을 듣고 있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의 숨소리가 거칠게 났다.
그가 어느새 졸고 있었다.
취해 졸고 있는 Y 실장을 그대로 두고 취기가 꽤 많이 달아오른 직원들은 부산하게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서로의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깐 시간이 흐른 듯했는데 꾸벅꾸벅 졸고 있던 Y 실장이 갑자기 경기를 일으키듯이 몸을 한번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홱 들고는 눈을 번쩍 떴다.
그를 지켜보던 내가 큰 웃음을 지으려던 찰나에 그가 반쯤 풀린 눈을 한 채 몸을 앞뒤로 흔들거리며 K를 향해 느닷없이 고성을 버럭 질러댔다.
“야 이 새끼야, 너 뭐 하는 놈이야!
이 새끼 끝까지 술을 안 처먹네. 그 한잔 마시기가 그렇게 힘이 드냐!
직장생활 오래 하고 싶으면 남들 하는 만큼은 따라 해야지. 어! 싫어도, 그냥 억지로라도 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맞지. 그래야 직장생활 오래 하는 거야! 내일 당장 나갈 생각이라면 개겨도 돼. 근데 아니잖아?
이건 뭐 술도 안 해, 담배도 안 해, 여자도 안 해.
아니다, 여자는 좀 하냐?
남자 놈들은 무조건 술! 담배! 여자! 이 셋 중에 어느 하나라도 안 걸리는 놈이 없어 인마!
어디서 못하는 척이야!”
“…….”
“안 그러냐?”
K가 묵묵부답이자 그가 나를 바라보고는 여전히 풀린 눈과 혀 꼬부라진 소리로 나에게 동의를 구했다.
나는 Y 실장의 말과 행동에 아까부터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라있었다.
그리고 K를 옹호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무래도 지난번 K가 작성한 보고서에 내가 최종 서명을 해버려서 내가 그의 성과를 가로챈 것 같은 찜찜한 기분에 K의 편을 들어주면서 서로의 관계를 풀어나갈 계기를 항상 엿보던 참이기도 했다.
그래서 Y 실장의 말에 반기를 들면서 그를 탓하는 말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그가 별안간 주먹 쥔 손으로 거칠게 탁자를 내리치면서 K를 행해 다시 한번 소리를 버럭 질러댔다.
“야, 인마! 너 자꾸 이럴 거면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당장 돌아가 버리라고!”
“야, Y 실장, 그만해! 너가 자꾸 이러는 건 직장 내 언어폭력이고 갑질이야!”
나는 그에게 한바탕 소리 지르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K에게 잠시 바람이나 쐬자며 그를 데리고 나가는데 Y 실장이 여전히 초점 없는 눈과 함께 뾰로통한 말투로 내 뒤통수에 대고 한마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래, 쟨. 야, 야 됐다 그만, 그냥 우리끼리 계속 마시자.”
Y 실장의 술주정을 목격한 직원들이 서로서로 눈치만 보다가 이내 Y 실장 근처로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내가 K를 데리고 식당 밖으로 나왔을 때는 봄비가 잠깐 지나가고 난 뒤였다.
늦은 저녁 공기를 타고 어디에 있는지 모를 풀과 흙냄새가 코를 한껏 자극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잠깐 바람에 실려 오는 비에 젖은 풀과 흙냄새를 맡아가며 가슴에 맺힌 답답한 무언가를 서로 말없이 날려버리고 있었다.
“조직 생활이란 게 이렇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어딜 가나 이상한 사람들은 하나씩 다 있게 마련이야. 너가 좀 심하게 저 인간에게 걸렸다 싶을 뿐이지. 그러니 이해해라. 나도 이제 정년까지 십여 년 남짓 남은 것 같은데 상사 비위 맞추고 사는 건 나이든 나도 여전히 적응이 안 돼. 내가 계속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도 이제 슬슬 고민이고…….
연구만 하다가 기업체로 넘어온 거 후회해?”
내가 조심스럽게 늦은 저녁 하늘을 바라보며 K에게 말을 건넸지만, 여전히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아직도 지난번 그 일로 기분이 언짢은 건가?”
그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아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대답 대신 알 수 없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가 최근 협력사와의 불편했던 일이 너무 힘들다는 말로 화제를 돌리기 시작했다.
나는 좀 더 그의 얘기를 들어보려고 어제 방음 부스에서 그가 협력사와 통화할 때 고성이 오가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고 말을 꺼냈다.
“어제 깜짝 놀랐어. 그런 성깔이 있는 줄 처음 알았네. 왜 오늘 아침에 Y 실장이 뭐라 했을 때 적극적으로 방어 안 했어?
할 만큼 다 한 거잖아. 납품일 다가오기까지 가만히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수시로 진행 상황을 점검해가면서 보고 일정 지키려고 부단히 애썼잖아.”
K가 한숨을 크게 한번 쉬더니 말을 받았다.
“Y 실장하곤 이젠 얘기하기 싫어요. 말이 전혀 안 통해요. 워낙에 자기중심에 권위주의 의식까지 강한 사람인 데다가 J 부서장의 지시에 군말 없이 절대적으로 따르다 보니 그 지시사항이 불합리한 것을 본인도 잘 알면서 그대로 따르는 경우가 많죠. 그러다 보니 그 사람이 원하는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 내가 그 원하는 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냥 그 사람 앞에서는 다 변명이 돼버려요. 그러니 얘기가 안 되는 거죠.”
K가 말을 마치자마자 오늘 새벽에 협력사 직원으로부터 받았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납기 일 못 지켜드려 미안합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건은 기한 내 처리 못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제 통화하면서 정말 욕한 거 아닙니다.
혼잣말이었고 그조차도 우리 대표에게 해주고 싶은 욕이었어요.
그걸 두고 계속 저에게 문자 보내시면서 제 자존심을 상하게 하신 것은 용납하기 힘드네요.
사과를 받고 싶어요.
그리고 이제 다시는 볼 일 없을 겁니다.’
나는 마지막 문구가 마음에 걸렸다.
“이게 뭐야? 사과하는 것도 같고 그러면서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같고…….”
“저도 잘 모르겠어요.
새벽에 받은 문자였고 오늘 하루 종일 이것 땜에 심란했어요. 마지막 말 때문에 더…….”
나는 그가 건넨 휴대전화를 보면서 어제 통화를 끝내고 나서 K가 분이 덜 풀렸는지 그 협력사 직원에게 몇 차례 더 문자를 보냈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욕한 것을 사과하라고 스팸 문자 발송하듯이 여러 차례 문자를 보냈으나 결국 그는 사과를 받아내지 못했다. 협력사 직원은 철저히 그의 사과 요구를 무시한 듯 보였다.
그러자 K는 계속해서 분이 안 풀렸던지 심지어 우리 회사 올 실력이 안 되니 그런 곳이나 다니면서 남이 갖다 주는 일에 치여 사는 인생밖에 안 된다는 비아냥 섞인 말까지 K가 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말은 조금, 아니 많이 선을 넘은 듯한데.”
걱정스러운 마음에 조심스럽게 그가 보냈던 문자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나도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Y 실장과 J 부서장에게 그동안 받은 업무상인 스트레스를 나도 모르게 그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계속 풀려고 했던 것 같아요. 말이 든 문자든 그런 식으로 한바탕 쏘아대고 나면 너무 후련했어요. 근데 정말이지 지금 너무 미칠 지경입니다. 전부 내 잘못인 것 같아서 내가 사과하려고 연락했지만, 오늘 온종일 연락 두절이에요. 아까 그 업체 갔을 때도 그가 무단결근에 지금 어딨는지 전혀 모른다고 하고…….”
그의 불안함이 역력히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일단 사태를 좀 더 지켜보자고. 그런데 나 말고 이 문자 내용 아는 사람 더 있나?”
그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들겨 주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다시 직원들이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