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장편 - #15 (제4장 갑질)
<#14에 이어서...>
수십 병의 술병을 자랑이라도 하듯 한쪽에 몰아 놓고 직원들은 여전히 술잔을 부딪치며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몇몇 직원들이 Y 실장 주변에 몰려있었다.
그들은 “우리, 우리 실장님” 이라고 콧소리를 내면서 끌어안으며 그를 추켜세우고 비위를 맞추어 주고 있었다. 직원들은 Y 실장이 자신들을 질책할 때 동료들 앞에서 망신 주는 걸 항상 못 마땅해하고 뒤에선 욕을 하며 싫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으면서도 이렇게 술자리에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친한 척을 했다.
이런 것도 직장생활 잘하는 일종의 처세술이라면 처세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술자리 처세술 가운데 고도의 기술 중의 하나가 이제 마지막 잔을 기울일 때 술이 많이 취한 몇몇 직원들 사이에서 나왔다.
긴 술자리에 중도 이탈 없이 끝까지 살아남은 직원들이 마지막 술잔을 돌리고 있었다.
“자, 막잔을 들고 이제 끝내자고. 빨리 잔들 가득 채워!”
Y 실장이 재촉하였다.
K에게도 가득 채운 술잔이 돌아왔다.
그에게 술을 따라준 직원이 그냥 마시는 시늉만 하라고 귀띔을 해주었다.
그리고 Y 실장의 마지막 건배사를 끝으로 술을 목구멍에 들이키려고 모두가 고개를 젖히는 순간 술에 잔뜩 취한 몇몇 직원들이 입으로 술잔을 가져가는 척하면서 전광석화와도 같이 재빨리 테이블 밑으로 술잔을 쏟아버렸다.
나 역시 상사들과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술자리를 가질 때 종종 써먹던 짓이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가며 술자리를 가져야 하느냐는 질문은 중요치 않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조직이라 판단되면 그렇게라도 해서 살아남으려는 노력이 중요할 뿐이다.
그렇게 상사 앞에서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는 티를 내는 것이 중요했지만 몸이 술을 거부하는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써먹는 위험천만한 손기술인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기술을 잘못 쓰다가 누군가에게 걸리기라도 했다면, 특히 그 누군가가 같이 술을 마시던 상사였다면 여간 곤욕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몇 어설펐던 그들이 Y 실장의 눈에 띄지 않고 나의 눈에 띈 것을 그나마 천만다행으로 여겨야 했을 것이다.
그날 이후 며칠이 지났고 우리는 몇 날 며칠 연락 두절이었던 그 협력사 직원이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J 부서장에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자살을 시도했지만, 다행히 회복 중이라는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 이후 벌어졌다.
그 소식을 접한 며칠 후 K 박사가 자신의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그는 협력사 직원처럼 살아나지를 못하였고 안타깝게도 영원히 우리 곁을 그렇게 황망히 떠나버렸다.
그의 유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유서에는 회사로부터 그가 받은 불합리한 일들이 적혀있었다고 했다.
특히 그 중엔 내가 J 부서장의 성화에 못 이겨 얼떨결에 최종 서명했던 K의 보고서에 관한 내용과 그동안 여러 회식 자리에서 Y 실장에게 받은 치욕스럽고 모욕적인 말들 그리고 협력사 직원에 대한 미안한 감정과 함께 그에게 사과를 남긴 글이 그 유서에 모두 담겨있었다고 했다.
회사는 모든 직원에게 K의 빈소에 조문하지 말라고 조직장들을 통해 지시했는데, 유족들이 굉장히 화가 많이 나 있으며 회사관계자의 조문을 원치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 유족들이 장례 이후 회사를 상대로 소송 준비 중이라는 말이 들려왔다.
K의 자살로 인한 죽음 이후 회사는 자체적으로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당연히 우리 부서가 뜨거운 감자로 부상이 됐다.
어느 날 J 부서장은 각 실의 실장들에게 하달하여 전 부서원을 대회의실에 소집시켰다.
그날 회의 소집 목적은 조직문화 개선을 위한 부서장과의 간담회 자리가 표면적 목적이었지만 사실상 직원들의 입단속 강화가 주목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번 사건에 대해 언론사에서 잠행취재가 시작됐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언론의 취재는 상당수가 어느 누군가의 제보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분명 누군가의 제보가 있었다고 회사는 판단했고 서둘러 내부 입단속을 하기 시작했다.
회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언론의 관심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상장사인 회사가 최근 들어 초극강 디지털 4D 홀로그램의 상용화를 눈앞에 두면서 주가가 엄청나게 치솟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가가 한창 오르는 회사였는데 이번 갑질과 직장 내 괴롭힘 사건으로 주가가 내려가지나 않을지 회사는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그 주가를 끌어올린 여러 부서 가운데 우리 부서가 단연 핵심부서였다.
그러니 회사가 우리 부서에 거는 기대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회사가 흔들리는 조짐이 보이면 경쟁사의 스카우트 제안이 직원들에게 들어올 수 있어서 회사는 직원들이 경쟁사로 이직하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 했고, 또 회사 일에 연루된 직원자살 사건으로 싱숭생숭한 회사 분위기에 동요되지 않도록 직원들을 다독일 필요가 회사 차원에서 필요하다는 인식을 경영진들이 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직원들은 차라리 이 기회에 J 부서장이 책임을 지고 자발적으로 회사를 떠나든지 아니면 회사가 조직관리를 허술하게 한 J 부서장을 자르기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건재하였다.
이유는 단 하나다.
그를 감싸주는 본부장이 건재한 이상 그 역시 건재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는 직원들이 현재 어떤 요구를 하는지에 무관심했으며 오로지 언론에 좋지 않게 기사가 나가는 것을 막는 데에만 혈안이 된 듯싶었다.
대회의실에 모인 부서원들을 앞에 놓고 J 부서장은 무슨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 마냥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 지금부터는 허심탄회하게 할 말, 못할 말 다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여러분들이 나에게 하는 모든 말들을 다 경청할 테니 나에 대해 그리고 조직문화 개선 관련하여서 하고 싶은 얘기 있으면 뭐든 다 해도 좋아. 자발적으로 아무나 먼저 말 해봐.”
“…….”
큰 회의실에 침묵이 잠시 흘렀다.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없는 건 예상했던 일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J 부서장 앞에서 어떤 발언을 하더라도 실제로 반영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J 부서장에 대해 부정적 발언을 하면 오히려 그 발언을 한 당사자의 신변에 어떤 위험이 다가올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사는 몇 해 전부터 조직장들을 대상으로 평가를 시행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상당수 직원으로부터 가장 최악의 평가를 받은 자는 J 부서장이었다.
그 평가를 근거로 지금은 퇴사한 전임 본부장이 매년 임원 진급 명단에서 J 부서장을 항상 제외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더구나 당시 본부장은 인사팀장을 그에게 보내어 조직관리를 잘못한 점에 대해 구두 경고까지 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일 후 부서장은 부서 내 실장들을 불러서 어느 실의 어느 직원이 자신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했는지 발본색원해오라고 지시를 내린 적도 있었다.
나는 그 당시 실장으로서 J 부서장에 대한 그러한 졸렬한 모습에 상사로서의 최소한의 예의만 남겨두고 철저하게 그를 인간적으로 무시해왔다.
싫고 좋고에 대한 감정을 숨기는 걸 잘 못 했던 나로서 J 부서장에 대해 좋은 얼굴로 그를 대하기 어려웠던 것을 그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내가 실장직책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게 된 것도 결국 J 부서장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의 본부장은 성과주의를 지양하면서도 동시에 조직문화개선을 강조하였다.
일할 맛 나지 않는 직장에서 성과만 좋게 나면 그 기업은 오래 갈 수 없다는 신조였다.
그러나 일할 맛 나는 직장을 만들겠다는 그의 노력은 오랜 기간 성과 위주와 상명하복 조직문화에 익숙해 온 직원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들을 쉽게 무너트리지 못했다.
게다가 때마침 불어닥친 경영악화로 인해 그의 잘못은 아니었으나 스스로 회사를 나가면서 지금의 본부장이 등장함과 동시에 더욱 일할 맛이 나지 않는 직장이 되었지만, 성과는 오히려 올라가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본부장의 오른팔이었던 J 부서장이 정식 임원이 아니면서도 임원 대우받으며 회사의 실세 자리에 견고히 올라앉아 있었다.
그런 그가 본부장의 두터운 신임 속에 막강한 권력을 움켜쥐자 나의 실장직을 박탈했다.
내가 다른 곳으로 전출 가지 않거나 대기발령 되지 않은 건 본부장이 그나마 나를 많이 신임해준 덕분이었다.
J 부서장의 서두 인사가 한참이나 끝난 상황이었지만 내 예상대로 직원들은 그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J 부서장은 침묵을 깨고 이내 Y 실장을 지목하여 먼저 시작해 보라고 강제적으로 지시했다.
Y 실장은 J 부서장이 누구보다도 가장 많이 신뢰하고 신임하는 자였다.
그는 항상 부서장 앞에서 꼬리를 내렸으며 단 한 번도 노(No)라고 외친 적 없는 전형적인 예스맨(Yes man) 이었다.
직원들 앞에서는 항상 부서장을 뒤에서 욕하고 툴툴거렸어도 J 부서장이 지시한 모든 것은 아무리 불합리하더라도 군말 없이 수행하려 하였다.
Y의 출세욕은 참으로 남달랐다.
내가 실장으로 있었을 당시도 그는 나에게 먼저 보고를 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부서장에서 단독 보고를 하는 등 나를 그렇게 철저하게 무시한 적이 여러 차례였다.
내가 그에게 보고체계 준수를 당부했지만, 그는 그때뿐이었다.
직접 J 부서장에게 단독보고하는 일이 점차 늘어나다 보니 마치 모든 일을 Y 혼자서 다 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그 또한 부서장에게 그렇게 내비치는 걸 즐기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개인 업무가 아닌 팀을 이루어 행한 업무까지도 실장이었던 나를 거치지 않고 혼자 단독으로 J 부서장에게 최종 보고하는 행위로 인하여 많은 직원이 이를 불만으로 여겼다.
강제적으로 발언 기회를 얻은 Y는 기다렸다는 듯이 J 부서장에게 아무런 불만도 없다는 말로 운을 떼었다.
그러면서 오히려 직원들을 향해 한마디 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