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장편 - #16 (제4장 갑질)
<#15에 이어서...>
“예전부터 조직장 평가하는 일에 있어서 부서직원들이 너무 솔직하게 저평가 해버리는데 이것이 연말 인센티브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아직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뭐, 저도 그렇지만 맘에 안 드는 일이 있어도 평가는 후하게 합시다. 그래야 우리 다 같이 돈 더 받지요.
근데 혹시 오해하실 것 같아 노파심에 한마디 더 드리자면 제가 뭐 돈 더 받자고 상사 평가를 잘해 달라는 건 아니고요, 인사팀에 알리는 평가는 그냥 후하게 다 잘 주고, 지금 이런 자리에선 솔직해지자는 겁니다.
근데 저는 진짜로 부서장님에게 불만이 전혀 없네요.”
그가 말끝에 매우 겸연쩍게 웃었고, 그의 말을 들은 직원들 표정이 다들 황당하다는 듯 일그러지고 있었다.
하지만 J 부서장은 싫지 않은 듯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이 중에서 자네가 불만이 제일 많은 게 아니냐고 농담조로 반문하였다. 그러면서 조직장 평가에 대하여 Y 실장과 같은 의견을 내비쳤다.
“샐러리맨한테 중요한 게 뭐야?
결국, 봉급 더 받는 게 중요한 거 아냐?
다른 부서는 하나같이 상사 평가를 후하게 해. 그래서 조직장들 등급이 높으니 결국 부서원들의 성과보수가 올라갔어. 지난해도 남들은 인센티브 다 받았는데 우리만 못 받았잖아.
너무들 솔직한 거니 순진한 거니?
조직장 평가 안 좋게 해서 자네들이 얻은 건 뭐야?
그냥 돈만 잃은 거야. 그러니 올해 연말 조직장 평가에서는 모두 후하게 평가하고 다른 부서들처럼 돈 더 받아가라고. 그 대신 지금 허심탄회하게 말들을 해봐. 나에 대한 불만이 뭔지. 인사평가시즌만 되면 개선도 안 될 형식적인 조직장 평가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내가 마련한 이런 자리가 여러분들에겐 기회야.”
그의 독려가 끝났지만, 여전히 아무도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를 하려는 자가 선뜻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더는 안 되겠던지 J 부서장은 앉은 자리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강제로 발언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면서 억지로 한마디씩 하는데 하나같이 실질적인 얘기는 안 나왔다.
정말 하고 싶은 얘기는 J 부서장 스스로 결단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즉 책임을 지고 부서장직에서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지만 아무도 그런 말을 쉽사리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억지로 해야 하는 발언이다 보니 모두 자기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원론적인 말들만 쏟아내던 중이었다.
내 후배 H의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그가 J 부서장 앞에서는 절대로 꺼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
그것은 그가 예전 본부장의 이름을 거론하였던 것이고, 급기야 예전 본부장과 J 부서장을 비교 평가하는듯한 발언까지 서슴없이 하였다.
그러면서 몇 해 전 조직장에 대해 인사평가를 하면서 우리 부서직원들이 J 부서장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하여 부서장이 인사팀으로부터 구두 경고받은 전력을 언급했고, 인사팀에 부정적인 말을 한 직원을 찾아내라고 부서장이 그 당시 실장들에게 지시한 적이 없었는지 묻기도 하였다.
게다가 이곳에 모인 직원들이 그런 전력을 모두가 다 알고 있는데 이런 자리에서 누가 감히 허심탄회할 수 있겠냐고 반문하였다.
그렇게 그가 거침없이 말을 뱉고는 자신도 특별히 부서장에게 할 얘기가 없다 하며 자신의 발언을 끝마쳤다. 직원 모두에게서 회심의 얼굴빛이 감도는 걸 느낄 수 있었으나 J 부서장과 Y 실장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못하였다.
나는 J 부서장에 대한 부서직원들의 평가결과를 전달받은 예전 본부장이 그당시 화를 몹시 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본부장이 열의를 갖고 시도했던 조직문화개선에 방해가 됐던 인물이 J 부서장이었다.
당시 본부장은 인사팀을 통해 J 부서장을 구두 경고 조치했는데, 부서장에게 이런 곤욕을 안겨다 준 그 직원이 누구인지를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물론 J 부서장이 노발대발하며 자기를 부정평가한 직원을 발본색원하라 했지만 나는 끝까지 그가 누구였는지를 J 부서장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그는 바로 내 후배 H였다.
단순히 학연 관계에 얽혀서 그를 보호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J 부서장에게 틀린 말을 한 건 하나도 없었다.
나 역시 J 부서장에게 불만이 많았었고 단지 부정적으로 기술하는 표현의 정도만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J 부서장은 H의 발언에 할 말이 많은 듯 여러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한두 번 겪은 상황이 아니었다.
직원들의 의견을 그가 전적으로 수용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H의 부정적인 발언에 J 부서장이 짐짓 흥분을 가라앉히며 태연한 척해가면서 계속해서 자기 합리화를 해나가고 있었다.
“나도 잘 알아. 내가 직원들에게 부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것을.
나를 두고 ‘꼰대’라고 그러지. 아집 강한 고루한 늙은이를 빗댄 표현이라지 아마?
또 날 두고 ‘비실이’라고 부르는 것도 잘 알아. 그래, 내가 본부장과 가깝고 그분을 비서실장처럼 잘 수행하고 있지. 근데 이게 뭐 잘못된 일인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내가 꼰대라는 소리를 듣는 건 아마 소통이 잘 안 돼서 그런 말이 나오기도 했겠지.
근데 지금 이런 시간 갖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소통 안 되는 사람이라면 이런 시간도 안 가지려 할 거야. 나니깐 자네들 불러서 이 귀한 시간 할애하며 열심히 경청하려 하는 거라고.”
어쩐지 직원들 모두 훈시를 듣는 느낌이었다.
그날 간담회라는 목적으로 모인 회의 자리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은 J 부서장은 남들이 뭐라 하든 계속 자기 길을 묵묵히 걷겠다는 것이었다.
회의실을 나오면서 직원들이 서로 간에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뭐 오늘 본인 입으로 스스로 꼰대 시인 한 거잖아.”
“저러니 꼰대지. 자기 말만 하고, 제 기분 나는 대로 앞으로도 계속하겠다는 거 아냐?”
“이럴 거면 뭐하러 바쁜 사람들 불러다 앉혀놓은 건데?”
“직원들이 왜 다들 말을 안 한 것인지 그걸 저 사람만 아직도 모르는 것 같아. 제대로 말해서 보복이라도 당하면 어찌할 건데. 그래서 아까 H가 했던 말이 정말 통쾌했어.”
“오늘 젤 웃긴 건 자기 입으로 비실이라고 말한 거야. 계속 본부장에게 딸랑딸랑하겠다는 걸 회사를 위해 충성을 다 한다고 포장을 해버리니 이제 더는 할 말이 없다.”
웅성거리며 회의실을 빠져나가려는 우리 실의 직원들을 Y 실장이 다급하게 불렀다.
그리고 우리 실의 직원들만이 남은 상태에서 Y 실장이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뭐, 오늘 회의는 J 부서장이 면피하려고 만든 자리란 건 다들 알 테고, 자기는 열심히 직원과 소통했던 사람이라는 걸 대내외에 알리고 싶어 한 것 같아.
지금 어떤 언론사 기자가 잠입 취재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해서 회사가 상당히 예민해져 있는 상황이고 그래서 직원들 입단속 철저히 하라는 지침이 조직장들에게 내려왔어.
누군가 우리 조직문화에 대해 언론사에 제보했다는 얘기야.
전보다 더 내부 보안에 신경 쓸 거고, 외부인 출입 시 신분검사 더욱 강화될 거야.
그리고 아까도 연말 상사 인사평가 얘기 잠깐 했지만, 우리 서로 인간적으로 내부 총질은 하지 맙시다!
또 지금 K 박사 유서가 공개되면서 우리 회사가 비상시국인 거 다들 알지?
지금 우리 부서장 말고 우리 실 전임 실장하고 나하고 전부 다 유서 내용에 걸려있어.
근데, 막말로 우리가 K에게 잘못한 게 뭐냐?
내가 걔한테 회식 자리에서 욕하고 또 억지로 술 먹인 적 있어?
더구나 내가 법인카드도 안 쓰고 순전히 내 돈으로 자기 먹을 무알코올 맥주까지 사다 바쳤잖아!
안 그래, 막내야?”
막내 사원이 그날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처럼 다부진 표정과 함께 ‘네, 맞습니다!’라며 응수하였다.
“그래! 내가 걔한테 뭘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조직 안에서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아서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했지.
더구나 걔에 대해 그동안 내 말이 지나쳤다 싶은 건, 그건 다 농담이었지.
그래, 농담.
농담 아니라면 여기 있는 직원들은 이미 다 죽었게?
안 그래?”
그가 우리 모두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부 직원들이 Y 실장의 반강제적 동의 요구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였다.
“오히려 잘못은 K야.
조직 생활에 적응도 못 했을뿐더러 누가 협력사 직원에게 막말을 그렇게 하라고 했어?
아주 완벽히 갑질을 제대로 했더구먼.
이건 그 직원이 폭언을 당했다고 경찰에 이미 말한 사실이야.
근데 한마디로 K는 자기 잘못을 우리한테 전부 뒤집어씌우고 죽어버린 거야.
걔가 피해자가 아니라 걘 분명히 가해자고 우리가 피해자인 거야.
다들 내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를 잘 알겠지?
협력사 직원 자살미수 건은 조직에 적응 못 한 K가 단독으로 벌인, 그냥 개인 일탈일 뿐이야.
더구나 K가 죽은 건 안타깝지만 이것 역시 개인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고 회사와 전혀 무관한 일이야.
회사도 앞으로 소송에 대비해 그렇게 대응해 나갈 것 같아.
외부에 알려지게 되면 되레 우리만 손해이니 지금부터 각자 언행에 조심들 하라고.”
Y 실장은 말끝에 경찰 조사와 함께 향후 법정 분쟁에 누구나 휘말릴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두려움을 던져주었고 직원들 모두 연대 책임의식을 갖게 했다.
직원들이 하나씩 회의실을 빠져나갈 때 후배 H가 슬그머니 내 팔을 붙잡고 귓속말을 하였다.
“형! 저 인간 완전히 미친 거 아냐? 막말과 폭언은 누가 누구더러 했는데!”
나는 동의하였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럴 때 직원들이 H를 툭 치며 말을 걸어왔다.
“오늘 정말 용감했어요. J 부서장에게 그렇게 말할 줄이야!”
“부서장이 오늘 좀 뜨끔 했을 거야.”
“금기어를 감히 겁 없이 건드리다니! J 부서장 앞에선 절대로 해선 안 될 말이 전임 본부장 이름이잖아!”
“H 같은 사람도 있어야 해. 그래야 저런 양반이 조금이라도 정신 차리지.”
H를 지나치는 직원들이 한마디씩 건네자 그는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의 그 일이 H에게 엄청나게 큰 고통으로 다가올 줄은 나를 포함해 우리 가운데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