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장편 - #18 (불가항력)
<#17에 이어서...>
회사가 급성장을 계속하다가 한때 성장이 주춤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회사경영상태가 급작스럽게 곤두박질치면서 어려워지게 되어 직원들이 교대근무를 하고, 임금을 삭감하는 등의 조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구조조정을 통해 인원을 감축하는 등의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꺾일 줄 모르고 치솟기만 하던 급성장의 길에서 잠시 잠깐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던 시기였다.
회사 내 신규채용은 당연히 중단되었고 현재 인원으로 회사경영을 유지하려 했던 경영진은 직원들의 이탈을 막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몇몇 부서의 팀들에서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소위 직장 내 왕따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있던 팀에도 그런 직원이 하나 있었다.
팀장은 팀 회의 소집할 때 어느 날부턴가 항상 그를 소외 시켰다.
그가 회의실에 없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일부 직원들이 그에게 부랴부랴 연락할 때가 많았는데 팀장은 언제나 그에게만 회의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었다.
그러다 보니 팀원들이 모두 회의 장소에 있을 때 그만이 홀로 텅 빈 사무실에 앉아 멀뚱히 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곤 하였다.
직원들 간의 식사 자리에도 그가 안 보이는 날이 많아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눈에 띈 것은 그가 매일같이 출퇴근만 기계적으로 하는 모습이었다.
팀장이 그에게 아무런 일도 맡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직원들의 업무가 가중되어 직원들이 그에게 일을 맡겨달라고 요청했어도 팀장은 들은 체 만 체하였다.
그렇게 하루 이틀 점점 그가 회사 내에 있으나 마나 한 그런 투명인간과 같은 존재로 점점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는 몇 해 전 맡은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낸 후 최우수 사원으로 표창받기도 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한때는 능력 있는 직원으로 회사가 인정했었다.
하지만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게 팀장이 의도적으로 그를 철저히 소외시키면서부터 그는 저평가받는 사원으로 변질이 돼가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어느 날 팀 내에 직원들이 모두 외근을 나갔고 사무실에는 나와 팀장만이 있던 중에 온종일 본인 책상 앞에서 아무런 할 일 없이 자신의 모니터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를 팀장이 조용히 부르는 모습이 내 눈에 띄었다.
조금은 멀리 떨어진 거리였지만 팀장이 그를 불러놓고 하는 말이 나에게 간발 적으로 들려왔다.
“도대체 언제까지 버틸 건데? 이제 결단해야 하지 않냐?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줄 도리가 없어. 회사가 이미 결정한 일을 어떻게 번복해?
더이상 시간 오래 끌지 말고 빨리 정리해.”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를 개인적으로 조용히 만나서 자초지종을 들었을 때 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부터 두 달여 전 인사팀에서 면담 요청이 와 인사팀장 면담을 했지요.
나 말고 몇 사람들이 더 있었는데 그날 그 자리에 모인 직원들은 권고사직을 권유받았어요.
이유는 모두 5년 이내 저평가를 단 한 번이라도 받아본 적 있는 저성과자들이라서 그러는 거랍니다.
그게 퇴사 이유에요.
회사가 지금 어렵다는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구조조정단계까지는 아니잖아요.
설마 그렇더라도 회사가 노력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해보려는 무슨 조치가 있어야 하는데 그냥 막무가내로 직원들을 내보내려 하고 있어요.
예전에 다른 곳에 수년간 파견되어 일하면서 우수직원 표창도 받았지만, 다시 본사 들어와선 예전만큼 성과 내기가 쉽지 않았지요.
보이지 않는 텃세가 어느새 자리 잡고 있더군요.
본사 들어오자마자 그해에 인사고과 저평가를 한번 받은 적 있었는데, 그땐 뭐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가 버린 게 지금 이런 결과로 나타날지 몰랐네요. 정말 미치겠습니다.”
회사가 구조조정을 단행할 때 그 기준을 어떻게 정하든 그건 회사의 결정이고 뭐라 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적어도 그런 최악의 상황까지 가기 전에 회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은 전부 해봐야 했지만 지금 이렇게 아무런 공식적인 공지 한번 없이 일부 직원들을 조용히 불러서 퇴사를 강요하는 건 너무하다 싶었다.
하지만 그를 비롯하여 나머지 직원들 모두 아무도 강력하게 회사를 상대로 이의제기하지 못하였다.
애초부터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왜 저평가를 받아야만 했는지에 대한 철저한 인사평가 검증 요구가 있어야 했지만 너무나도 순진하게 회사가 하는 평가를 그대로 수용하고 말았다.
겉으로 보기엔 하나같이 성실한 자들이었고 일밖에 몰랐던 그들이었지만 훗날 자신들이 이렇게 조직의 가혹한 희생양이 될 줄 알았더라면 당시의 일을 가볍게 여기며 대충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선 너무 늦은 것이다. 자신들이 저평가를 받은 것에 대해 시간이 꽤 흐른 지금에 와서 그것을 제대로 입증하고 반론을 제기할 근거가 너무나도 희박해진 것이 그들이 회사를 상대로 저항할 수 없게 하는 큰 요인이 되었다.
한편으론 그동안 이의제기를 오히려 안 한 덕분에 그들이 그나마 회사를 오래 다닐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그러니까 정규직 신분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회사에 고분고분 복종했기 때문이었다.
조직에 반기를 들었을 때는 그만한 각오는 반드시 해야 한다.
정규직이라는 신분이 무조건 고용안정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 것이었다.
정규직이라도 회사가 작정하고 쳐내기로 마음만 먹으면 일도 아닌 것이 돼버린다.
나는 이런 예전 경험을 근거로 H에게 조언하고 싶었다.
그의 선택지는 많지 않아 보였다.
그가 더 늦기 전에 위험을 무릅쓰고 지금 당장 회사에 강력하게 저항을 하던지, 그렇지 않으면 회사가 내린 방침을 아무 말 없이 고분고분하게 따르던지 그렇게 양자택일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문제 삼지 말고 그대로 회사방침을 따르길 조언하였다.
회사가 당장 그를 일방적으로 쫓아낼 수 있는 어떠한 근거도 현재는 없다.
하지만 회사의 결정에 반기를 드는 순간 회사가 그를 내쫓을 궁리를 더욱 할 수 있기에 그가 억울한 감정을 추스르고 사태를 좀 더 지켜보았으면 하는 나의 바람이 더 컸다.
“아니야. 아무것도 항의하지마! 절대 그래선 안 돼.
지금의 결정은 Y 실장이 말했던 것처럼 실장 선에서 단독으로 인사권을 행사해서 이루어진 게 절대 아닐 거야. 회사 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거라고.
한마디로 경영진들이 결정한 일이야.
물론 그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직속 상관인 Y 실장하고 J 부서장일 거야.
나도 아까 대화한 얘기 다 엿들었지만 너가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 보여.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걸 가지고 경영진들을 상대로 항의한다고 해서 그들이 자신들이 결정했던 일을 가지고 잘못이었다고, 실수였다고 그렇게 자기네들 입으로 시인할 것 같아?
설마 그들이 판단 착오를 했고 심사에 오점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과 실수를 절대 인정하지는 않을 거야.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왜냐면 그들이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순간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 발생해버리거든.
그 사람들은 그걸 두려워해.
그 책임이란 것을 지는 순간 저들은 자신들이 그간 쌓아온 모든 것을 한 번에 잃게 된다고 생각할 거야.
그러니까 어느 조직이든지 윗선에서 한번 결정 내려진 것을 두 번 다시 번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해.”
“뭐야, 그럼. 내가 억울해도 이대로 회사가 하라는 대로 따르라는 말이야?”
“어쩔 수 없잖아.
너가 분명히 회사 상대로 이의제기하는 순간 회사가 절대로 널 가만 놓아두지 않을 거라고.
이미 결론이 나버린 이문제를 갖고 회사 상대로 뭔가를 항의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마.
그러면 너가 정말 더 위험에 빠져들게 될지도 몰라.”
“위험에 빠져든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인데?”
“그때는 노골적으로 너를 회사에서 제거하려고 할 거야.
조직이 마음만 먹으면 그깟 직원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야.
조작질에 당해낼 사람 아무도 없어.”
“지금도 충분히 노골적이야 형!
대기발령은 암묵적인 권고사직이라고!
내가 왜 지금, 이 순간 그걸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그래 맞아. 그래도 지금이 훨씬 괜찮은 거야.
너 말대로 지금은 암묵적이지만 너가 회사를 상대로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그땐 더이상 암묵적이지 못해.
그러니 일단 참아보자.
지금 당장 받아들이기 어렵고 억울하겠지만 일단 회사지시에 따르고 상황을 좀 더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H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내 말을 모두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여전히 결연하였다.
“형 말도 일리가 있는데, 그래도 나는 못 받아들이겠다.
아닌 건 아닌 거야.
이번 중간평가에 대한 문제 제기부터 해서 인사 이동발령 절차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회사 내부 규정 모조리 살펴보고 회사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거야.”
나는 더이상 H의 말에 그 어떠한 조언도 해줄 수 없었다.
그는 이미 답을 정해놓고 있었고 자신이 그 답에 따라 앞으로 어떻게 계획하며 행동해야 하는지를 모두 다 아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그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나였기에 그의 말에 더해줄 말이 없었다.
다만 나는 그가 절대로 자신의 그 계획을 실행시키지 않기를 그저 바랄 뿐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