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의 불용자원을 정리하는 법

- 경장편 - #19 (위험한 카르텔)

by Johann

<#18에 이어서...>


6. 위험한 카르텔(Kartell)


H와 다시 만나 얘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 후 한 달이 흐른 뒤였다.


그는 잘 사용하지 않는 빈 회의실에 개인용 컴퓨터 한 대 달랑 놓고 몇몇 대기 발령자들과 좁은 공간 안에서 다른 부서로 팔려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곳은 매일 새벽에 일거리를 찾아 하루 임금 벌이하려는 단순직 노동자들이 몰려드는 인력시장과 같았다.

그나마 나은 점은 새벽 인력시장처럼 그날 운에 따라 허탕 치더라도 하루 벌이를 나서지 못하여 돈을 못 버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온종일 하는 일도 없이 개인용 PC만 하염없이 바라보다 퇴근하여도 매달 꼬박꼬박 급여는 지급되었다.

하지만 어느 미친 회사가 무노동 자에게 임금을 거저 지급하겠는가.

아무 이유 없이 대기발령을 받았거나 암묵적으로 권고사직을 받은 자들이 온종일 하는 일 없이 보내다 지친 나머지 자발적으로 회사를 나가만 준다면 회사가 법적으로도 책임져야 할 일은 전혀 없게 된다.


회사의 불용자원을 그렇게 정리해 버리면 그까짓 돈 몇 푼, 몇 개월 그냥 주는 것은 오히려 회사로서 기회비용으로 남는 장사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회사가 몇 개월이건 간에 그들이 자발적으로 퇴사할 때까지 무노동 유임금 정책을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회사는 육 개월이라는 시한부 기간을 사내규정으로 정해놓고 그 기간 안에 다른 부서에서 어떠한 방식이라도 인원충원을 해서 대기 발령자들을 데려가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팔려간다는 말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팔려나가기 위해서는 대기 발령자들 스스로 개인적 정치 행위가 부단히 요구되었다.

한마디로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으로 보일 수 있도록 평상시 자기관리를 잘해둘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개인 업무능력이 그 팀에서 요구하는 조건 안에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인성이나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조직원들이 같이 일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례도 종종 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결원이 생기기 전까지 대기 발령된 자들은 잠시 있다가 다른 팀으로 인사이동 되지만 회사가 그야말로 작정하고 내보내기로 한 대기 발령자들은 어느 부서 이건 간에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인사팀이 철저하게 이동을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대기발령 자가 육 개월을 꿋꿋이 버틴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데려가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기에 결국 팔려나가지 못하면 회사는 그들에게 잉여 인간의 딱지를 붙인 뒤 저성과자로 다시 낙인찍어버린다.


조직 내에서 그와 아무도 일하고 싶지 않다고 해버리면 별수 없다.

이로써 회사는 언제든지 그들을 퇴사시켜버릴 확실한 근거를 마련해 놓을 수 있게 되는 거다.

H가 회사를 상대로 저항하려는 걸 내가 만류하였던 것도 최대한 회사의 눈 밖에 나는 행동을 안 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래야 기회를 조금이라도 더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H가 그렇게 나서지 않으려 했기에 염려스러웠다.

노동자가 개인적으로 사측을 상대로 저항을 한다는 것은 더이상 그 회사 다니지 않겠다는 것과 똑같은 말일 수 있다.


회사 내에 노동조합이 있다면 얘기는 좀 더 달라지겠지만 안타깝게도 회사에 노조가 결성되어 있지 못하였다, 그래서 회사로부터 불합리한 어떤 불이익을 받더라도 이것에 단합하여 항의할 수단과 방법은 사실상 없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거대기업과 싸움을 해야 한다는 건 생계를 걸어야 하는 심각한 문제인 것이었다.

그날 H를 만났을 때 이렇듯 내가 우려했던 모든 어려움이 그에게 집중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형! 내가 사내규정을 가지고 인사팀장을 만났었어.

대기발령에 절차적 하자가 있었음과 Y 실장이 나를 상대로 한 인사평가가 잘못됐고 평가 하나하나 이해조차 할 수 없다고 이의제기했는데 거절당했어.

평가는 조직장 고유권한이라 자기네들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고, 더군다나 평가에 대한 이의제기 규정 차제가 사규에 없다는 거야.

그러면서 나보고 퇴사할 거라고 들었는데 언제 할 거냐고 되묻더라고?

도대체 누가 그런 헛소리 했냐고 물었더니 Y 실장이 그랬다는 거야. 미친 거 아냐?”


“Y가 왜 그런 말을 했지?”


“나도 모르겠어.

그래놓고는 퇴사 안 하겠다면 될 수 있으면 빨리 원하는 부서와 협의해서 갈 곳을 정하라는 거야.

그럼 당장 발령내주겠다더군.

근데 자기가 알고 있기로는 나를 원하는 부서가 없고, 대부분 나와 일하기를 싫어한다고 들었다는 거야.

인사팀은 강제로 어느 곳이든 간에 나를 당장 발령낼 수 있는 권한이 있지만 그렇게는 안 하겠다는 거야.

나를 위해서라고 하더라고.

내가 스스로 원하는 부서의 실장들과 얘기를 해보라는 건데, 나 지금 굉장히 혼란스러워.”


H의 말대로라면 회사는 이미 그를 버린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무엇이 문제였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잘 모르겠다.

Y 실장이 저성과를 이유로 댄 근거들이 하나같이 반박 가능한 것이었고 도무지 정상적인 평가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H가 조직에서 해악을 끼쳤거나 회사에 막대한 금전적 손해를 입힌 것도 아니었다.

Y 실장이 그를 거부한 것은 밑도 끝도 없이 단지 조직 내 저성과자라는 것이었다.

그냥 그것이 그를 내친 이유의 전부였다.

그리고 인사평가는 조직장의 고유권한이라는 짧은 말 한마디로 그 어떠한 이의제기도 거부해버리고 말았다.


국민이 이해하지 못할 사면권을 행사한 대통령을 비난할 수는 있어도 국민이 사면권 철회를 할 수 없는 건 대통령 고유권한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조직장의 인사평가 고유권한도 대통령 고유권한 못지아니하였다.


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회사가 H를 눈에 보이지 않게 조금씩 밀어내고 있다는 느낌을 서서히 받게 되었고 그 직접적인 정황을 어느 날 포착하고 말았다.


H와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부서가 있었다.

그곳의 실장과 내가 만났을 때 H를 하루빨리 자기 부서에 데려와서 함께 일하기를 원하여 인사팀과 접촉을 시도했었지만 계속 기다려 보라는 회신만 받고 있다는 것이었고 자체적으로 H와 접촉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다는 거였다.

나는 이 말을 즉시 H에게 전달했고 H는 지금 당장 인사팀장을 만나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좀 더 회사의 대응을 기다려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정황상 판단해 보면 회사가 너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확실해.

근데 왜 그렇게까지 해서 너를 제거하려는 건지는 좀 더 단서를 잡아낸 뒤에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의 차분한 제안에 그가 마음이 흔들린 듯 보였고 이내 아무 말이 없었다.


<계속>

이전 18화직장 내 정규직 왕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