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장편 - #21 (기득권 속으로)
<#20에 이어서...>
7. 기득권 속으로
H가 자살하기 한 달 전 J 부서장은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면서 외부에서 만나자는 제안을 해왔다.
내가 그를 만나러 간 곳은 A 그룹 회장이 자주 애용한다는 고급스러운 재즈 바(bar)였고, 내가 갔을 때 Y 실장 또한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첫마디는 내가 실장직에서 물러나 그동안 평직원으로 매우 힘들지 않았냐는 물음이었다.
짐짓 나를 위안해주는 듯한 말이었지만 그런 그가 가증스러웠다.
내가 실장직을 Y에게 물려주게 된 것은 순전히 그의 결정이었음을 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술이 몇 잔 들어가면서 서서히 그가 본심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한마디로 현재 소송 중인 H와의 첫 변론기일이 곧 다가오는데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진술서를 나와 Y 실장이 최대한 빨리 직접 작성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아주 간단해.
자네들이 그냥 부정적으로 진술을 해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Y 실장, 자넨 말이야, H가 우리 부서에 전혀 도움이 못 돼 주었던 놈으로 진술해주라고.
그간의 업무성과를 최악으로 기술을 해버리면 돼.
상관없어.
막 갖다 붙여.
뭐든 부정적인 것들은 죄다!”
“정말, 그래도 될까요?”
Y 실장이 약간 걱정되는 투로 질문하였으나 J 부서장으로부터 되려 돌아온 대답은 핀잔뿐이었다.
“내가 안 되는 걸 자네들한테 시키겠나?
다 괜찮아.
마음 놓고 진술서에 아주 최악으로 긁어버려.
우리 측 변호사들 여러 명이 진술서 문장들을 다시 가다듬을 거야.
그러면서 더 최악으로 만들어 줄 거라고.”
“이거 지금 조작하자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H가 도대체 뭘 잘못해서 우리 부서를 나가야 했고, 또 지금 대기발령 상태에 H가 왜 있어야 하는지 전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내가 약간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라앉히고 예민하게 반응하자 그가 신경질적으로 맞받아쳤다.
“이런 답답하긴. 상반기 업무성과도 형편없었고, 또…….”
“그건 이미 H가 반박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평가에 있어서 절차와 방식에 하자가 있었다고요.”
“야! 넌 무슨 말을 그리 함부로 해. 평가는 인사권자 고유권한이라고!”
내가 J 부서장의 말을 끊고 반박하자 이번엔 Y 실장이 발끈하였다.
J 부서장이 긴 한숨을 쉬고 이내 그것은 Y 실장의 말이 맞는다며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
자신들이 한 평가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는 더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나 역시 인사평가 권한을 가진 실장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일차 평가자로서 부하 직원들을 평가하면서 최대한 공정하면서도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애를 썼었다. 하지만 회사의 인사평가 시스템이 그 공정성을 뒷받침 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인사권자가 좀 더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상대평가 시스템을 개선해 달라고 인사팀장에게 건의한 적 있었지만 어떻게 객관적으로 평가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지를 역으로 따져 들고나오는 바람에 할 말을 잃었던 적이 있었다.
인사평가의 가장 큰 폐단은 2차 평가자에 의해 1차 평가자가 진행한 평가가 완전히 뒤바뀔 수도 있다는 문제였다.
일 년간 업무성과가 저조한 직원에게 최종적으로 낮은 평가를 주었지만, J 부서장이 유독 신임한 그가 다음 해에 진급 대상자였기에 2차 평가자였던 J 부서장이 오히려 최상의 등급을 주는 등급 조정을 해버리는 바람에 그로 인해 피해를 보아야 했던 다른 직원에게 내가 미안함을 전하면서 이해를 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던 기억도 있었다.
한마디로 직원 인사평가는 칼자루를 쥔 인사권자의 고유권한이었지만 인사권자의 주관적 평가나 일탈을 막을 그 어떠한 장치도 없었다.
고유권한은 권력을 잡은 자에게 민주주의가 허락한 합법적이면서도 유일한 독재행위일 것이다.
“H는 이번 대기발령에 불만을 품고 회사에 엿 먹이려고 보안을 철저히 유지해야 할 프로젝트를 악의적으로 외부에 알린 거야.
심지어 회사기밀사항을 경쟁사에 흘리려고 했던 정황도 회사는 추적 중이라고.
문제 많은 직원이었어. 자네가 H를 데려왔잖아.
그러니 도의적 책임을 지고 회사 요청을 들어주게.
이번 일만 잘 끝나면 자네 둘 다 회사가 섭섭지 않게 대우해 줄 거야.”
겁박인지 회유인지 모를 모호한 경계를 오가며 J 부서장의 제안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내가 H에게 전해 들었던 어느 날 점심시간의 비품창고에서 나눈 그들만의 은밀한 대화를 아무런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행여 내가 따지고 들 때 그들은 분명히 그에 대한 증거가 어딨냐며 나를 몰아세울 것이 뻔했고, 그렇게 내가 그들과 대립각을 세우게 되면 무엇보다도 나 역시 H처럼 표적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H가 꺼림칙한 중간 인사평가 문제로 고통을 당해야 했던 합리적 이유로 나는 K 박사가 자살하고 난 뒤 J 부서장이 조직원들과의 대화시간에 H가 예전 본부장을 거론하면서 J 부서장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로 인해 J 부서장이 화가나 복수를 하는 것이라 결론 내었다.
이러한 합리적 의심은 이미 H도 하고 있었던 바다.
하지만 그렇다고 볼 수 있는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내가 그 자리에서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나 역시 표적이 되는 것을 피하려고 더 이상의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한참을 아무 말 없던 나를 보고 J 부서장이 내가 그의 요구를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였는지 곧바로 나와 Y에게 솔깃한 제안을 하기 시작했다.
“Y 자네는 말이야 이번 소송 건만 잘 끝나면 임원으로 내가 만들어 줄 거야.
본부장이 내 손안에 있다는 거 잘 알고 있지?”
Y가 뜻밖의 제안에 흠칫 놀란 표정을 했지만 애써 그 표정을 감추는 것이 역력히 보였다.
그리고 J 부서장은 나를 보며 내년 인사이동에 있을 국외법인의 법인장 자리를 만들어 주고 기간을 채우고 돌아오면 나 역시 임원으로 승진될 수 있도록 준비를 다 해놓겠다는 것이었다.
“Y 실장은 애가 아직 초등학생이라 했지?
이 친군 애가 고등학생인데 자넨 왜 그렇게 늦은 거야?
허허. 아직도 둘 다 오래 일해야겠군.
어쨌든 자네들은 여기가 마지막 직장이 될 테니 임원까지 해서 조직 생활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내가 길을 만들어 줄게.
어때?”
말이 끝나기 무섭게 Y 실장이 “네, 잘 알겠습니다!”하고 우렁차게 답을 했지만 나는 술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한 무언의 대답으로 J 부서장은 그렇게 나 역시 승낙을 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하
지만 나는 긴 침묵 끝에 그에게 무겁게 질문을 던졌다.
“만약, 지금 하신 그 부탁을 제가 거절한다면, 그땐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잠시 그가 머뭇거리는 듯하였지만 단호하게 말하였다.
“음……. 지금으로선 내가 뭐라고 말은 못 해주겠네.”
그가 대답을 회피했지만, 나에겐 완전히 겁박으로 들렸다.
하지만 나도 결국엔 그들만의 기득권 속으로 어느새 들어온 느낌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