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장편 - #20 (위험한 카르텔)
<#19에 이어서...>
그 후 나는 한동안 H를 만나지를 못했다.
그런데 그가 대기 발령된 지 4개월째로 접어든 어느 날 내가 그토록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K 박사의 자살사건 이후 회사에 잠입 취재를 시도했던 언론사 기자가 드디어 그 모습을 회사에 드러냈다.
그 기자는 J 부서장과 Y 실장이 공모하여 몇 해 전 계약직 여사원을 A그룹 회장에게 성 상납한 의혹이 있고 그 방식이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행위로 성폭행으로까지 번졌다는 제보를 받았다는 것을 밝혔다.
더구나 K 박사의 자살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고 영향을 주었다는 사내 제보에 따른 해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또한, 회사가 곧 상용화할 초극강 디지털 4D 홀로그램 영상기술 관련하여 최근 A그룹 회장이 상용화되기도 전에 거금을 주고 차마 말로 다 표현하기 거북할 만큼 음란한 목적으로 서비스를 무상제공 받았다는 의혹에 대하여 J 부서장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내면서 기한 내 답변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전혀 근거 없는 소문이라며 이를 일축하고 철저하게 부인했다.
그러자 곧 몇 달간 취재한 회사의 모든 의혹이 기사화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언론사에 최초 제보한 자가 바로 H였다는 소문이 회사 내에서 파다하게 돌기 시작했다.
내가 H에게 연락하여 그를 만난 곳은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제삼의 장소였다.
그는 신변의 위협을 강하게 느낀 듯 보였고 약간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형, 내가 언론사에 제보한 것 맞아.
그런데 제보자가 나란 사실을 회사가 알고 있다는 것에 나도 놀랐어.
해당 기자한테 제보자 보호를 어떻게 하는 거냐며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자기도 정말 깜짝 놀랐다는 거야.
그러면서 아무래도 A그룹 회장이나 아니면 우리 회사가 자신의 언론사를 상대로 정보원을 동원해 캐낸 것 같다는군.
정말 누가 됐든 악독한 놈들이야.”
“A그룹 회장한테 우리 회사 기술로 비윤리적 서비스가 제공됐다는 의혹은 또 뭔 말이야?”
“그것도 절대 의혹이 아니야. 내가 얼마 전에 아주 우연히 그 일을 알게 된 거야.”
그가 전해준 말은 정말이지 듣고도 믿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점심을 먹으려고 모두 자리를 뜬 사무실에는 몇몇 직원들만이 다이어트를 한다는 이유로 점심을 거른 채 자신들의 자리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평상시에도 직원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 다른 층에 있었는데 예전에 회의실 용도로 쓰다가 현재는 비품창고로 쓰는 다용도실이 그곳이었다.
그 한편에 칸막이를 치고 대기 발령자들이 종일토록 있었는데, 원래는 다른 회의실에 있다가 H 혼자 남게 되자 인사팀에서는 회의실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얼마 전부터 H를 그 비품창고 곁에 딸린 조그만 공간으로 이동하게 했다.
그렇게 그가 혼자 머물면서 출퇴근하고 있던 때였다.
점심시간이었지만 따로 같이 식사할 직원들이 없어지자 주린 배를 대충 빵으로 때우고 낮잠을 자던 어느 날이었다.
고요했던 비품창고의 문이 삐걱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낯익은 인기척이 그에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름 아닌 J 부서장과 Y 실장이었다.
설마 이 공간에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자신들이 H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H는 숨을 잔뜩 죽인 채 칸막이 건너편으로 들려오는 나지막한 그들의 주고받는 소리에 귀를 쫑긋 기울이고 있었다.
“수고했어, Y 실장. 이번 건은 실수 없이 잘 마무리된 것 같아. 자네가 이번에 애 많이 썼어.”
“아닙니다. 제가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안가(安家)에서 장비는 잘 철수 해왔겠지?
회장 그 인간도 참 별종이야. 변태스럽기도 하고.”
“회장이 우리 회사 기술에 대만족을 표했다는데, 앞으로 상용화되어 이런 식으로 장사하면 정말 대박 날 것 같습니다.”
칸막이 너머로 Y 실장이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그 인간 세 시간씩이나 그 여배우랑 뭔 짓을 그렇게 열심히 한 거냐?
하여튼 미친 인간이지. 그런데 회장이 다음번엔 누구를 해달라고 하든?”
“그 K 상무가 그러는데 이번엔 좀 영계로 가보자고 하던데요?
회장님께서 S를 살짝 거론했답니다.
그리고 이번처럼 완전히 벗기진 말고 다음엔 야한 속옷을 좀 입혀달랍니다.”
“하여튼 미친놈이야, 근데 걔가 무슨 영계야?
그 인간은 이번에도 그렇고 하나같이 왜 남편 있는 그런 여자들만 찾냐?
듣던 대로 별종에 완전 변태 자식 이구만.”
Y 실장이 크게 소리 내 웃었다.
그러자 J 부서장이 조용히 하라고 낮은 목소리로 주의를 시키며 Y 실장 정강이를 걷어찬 듯 그가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머쓱해진 그가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이 칸막이 너머로 보이는 듯했다.
“지금 현행법이 약하고 걸려도 처벌조항이 없으니 망정이지, 암튼 무조건 이 건은 절대 밖으로 새나가면 안 돼. 알았지?
서버에서 송출 데이터 관련 자료 완전히 다 삭제하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벌써 다 했습니다.
테스트베드 진행 중이라 우리 부서 사람 외엔 서버에 아무도 접근을 못 합니다.
게다가 부서장님하고 저하고만 이 일을 알고 있잖습니까.”
“절대 걸리는 일이 없어야 해!
회장이 신신당부한 거야. 이 일 몇 번 해서 우리가 회장한테 받게 되는 돈이 얼마인지 알고 있지?
외부에 우리가 한 일이 알려지는 날엔 돈은 고사하고 우리 목숨도 담보 못 해.
지금 A그룹 회장을 상대로 거래하는 중이라고 우리는!”
J 부서장의 따끔한 호통에 Y 실장이 명심하겠다며 한결 풀이 죽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대답하였다.
그날 H가 칸막이 뒤편에서 잔뜩 숨죽이며 들었던 A그룹 회장이 연루된 그들의 대화 내용은 완전히 범죄행위였다.
“형! 처음 내가 언론에 이것을 제대로 알리려고 했던 건 절대 내부 총질이 아니었어.
나도 그 누구보다 내가 몸담은 이 회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그런데 성장을 방해하는 저해요소들이 너무 많아.
외형적으로만 급성장하는 회사가 얼마나 오래 갈 것 같아?
조직문화가 개판인 회사가 얼마나 오래 가겠느냐고?
내부적으로 자정 능력이 전혀 없는 것 같아서 외부 도움이 필요해 보였어.
그런데 이번에 A그룹 회장까지 우리 회사와 안 좋게 관련이 돼버린 걸 알았고, 더이상 참을 수 없어서 추가 제보했던 건데, 지금 내가 그 사람들에게 알려져 버린 거야.
형, 나 이제 어떡하지.
지금 솔직히 아주 두려워.”
H는 그날 이후 매우 난감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회사의 핵심 기술을 담당했던 직원으로서 기업기밀정보보안 유지 규정을 위반하여 회사 내 기밀을 외부유출하였고 이것은 대기발령에 불만을 품어 벌인 일로서 그 내용 또한 매우 작위적이라는 사유로 회사로부터 엄청난 금액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당해야만 했다.
게다가 A그룹 회장 또한 명예훼손으로 그를 고소했으며 소송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만남에서 그가 나에게 해주었던 마지막 말은 곧 그의 죽음을 암시하는 말이 되었다.
“형, 이 조직에 자기들만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위험한 카르텔이 있는 거 같은 느낌이야.
누구든 그 안에 걸려들면 살아남기 힘들 거 같아.
그야말로 그 안에서 ‘너는 바보다’ 그러면 진짜 바보가 되는 거고,
‘너는 도둑놈이다’라고 그러면 진짜 어느새 도둑놈이 돼버리는 거야.”
그랬다.
이제 회사는 자신들에 관한 모든 의혹을 전부 부정할 것이 예상됐다.
그리고 자신들이 살기 위해 피해자 행세를 해가며 온갖 발악을 다 할 것이고, 따라서 H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아 보였다.
H는 회사뿐만 아니라 A그룹 회장이 선임한 대형 로펌의 엄청난 수임료를 자랑하는 여러 명의 변호사로 구성된 소송단에 대항하면서 그야말로 피를 말려가며 벌어질 여러 거짓말과 조작질에 얼마만큼이나 강인하게 버텨낼 수 있을지만이 남은 것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