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장편 - #4 (제1장 불미스러운 일)
<#3에 이어서...>
나는 Y 실장에게 N이 억울하게 일방적으로 피해를 봤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현재까지 N에 대하여 행실이 좋지 못한 여자로 직원 사이에 말이 오고 가던 상황이었는데 사실을 제대로 알려서 그녀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하였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Y 실장이 테이블 앞으로 잔뜩 몸을 웅크리고는 내 앞으로 바싹 다가와 속삭이듯 말하였다.
“어디 가서 지금 얘기 함부로 말하고 그러지 마라. H도 입단속이 필요할 것 같아.”
“너, 내 얘길 어디로 듣고 있었던 거야? 이건 사실상 징계 대상 아니냐?
아니, 회사 차원에서 인사위원회에 회부 될 사안이 아니더라도 우리 자체적으로 최소한의 규율은 있어야 할 거 아냐? 약한 여자 직원 한 명이 속아서 지금 충격받고 출근도 못 하는 상황이잖아!”
“뭐? 징계? 무엇 때문에?”
“내 말은 굳이 뭐 그런 차원이 아니더라도 N이 지금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있는 셈이잖아.
전부 하나같이 N이 결혼할 남자를 꼬셔서 저렇게 사달이 난 줄로 알고 있잖아!”
내가 말끝에 약간 소리를 내지르며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대꾸하자 그가 웅크렸던 몸을 뒤로 크게 젖히며 기지개 켜듯 손을 올렸다 내리기를 한 후 한숨을 길게 쉬고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는 듯해 보이는 모습이 여실히 느껴졌다.
“나 사실 다 알고 있었어. 휴가 중인 N을 외부카페로 불러 잠시 만나서 면담도 이미 다 했고. 너가 지금 말한 건 거의 다 사실이야. 하지만 넌 지금 편협된 사고에 빠진 거라고! 일방적으로 P가 한 말만 듣고, 아니 그것도 제삼자인 네 후배 H에게 전해 듣고 지금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거잖아. 더군다나 술자리에서 P가 말한 거라며? 아, 진짜, 답 없네! 이 친구야, 넌 술자리에서 술기운에 뱉어낸 말을 다 믿냐?”
“내가 뭘 잘못 알고 있기라도 한 거야?”
“당연하지! P는 하늘에 맹세코 N을 사적으로 만날 생각은 꿈에서조차도 생각해 본 적 없다는 거야.
그런데 계속 N이 유혹해온 것이고. 예전부터 둘만 있으면 사무실에서도 N이 P에게 신체접촉을 많이 했던 것은 이미 P에게 들어서 누구나 다 아는 얘기잖아.
젊은 사내놈이 그렇게 먼저 유혹하는 여자를 어떻게 당해내냐고. 오히려 속은 건 P야. 피해자라고.
자기는 결혼할 여자가 있다는 걸 확실히 얘기했다는 거야.
그런데도 계속 유혹해서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거라더군. 그런데 N은 또 다르게 얘기해. 너가 H에게 전해 들은 바로 그 술자리에서 P가 술에 취해 한 거짓된 얘기를 N이 나한테 하더라고.
자신이 P에게 속았고 말이야. 자신이 피해자라 주장하지. 내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이해가 되나?”
그렇다, 서로의 주장이 상반됐다.
그들은 서로가 피해자라고 우기는 상황이었고 가해자는 없었다.
내가 한동안 침묵하자 Y 실장이 다시 몸을 테이블 앞으로 잔뜩 웅크리고 다가오면서 나지막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자, 정리할게. 이 사건은 무슨 징계할 사안도 아니고 뭣도 아냐. 그냥 젊은 애들 둘이 서로 좋아서 놀다가 헤어진 거야. 서로 합의한 관계라 누구도 탓할 수 없는 거라고. 도덕적, 윤리적 문제?
그런 건 누구에게 해당하는데? 야, 막말로 너가 P였으면 그 상황에서 그냥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수 있겠어? 반대로 N이라고 한다면 P 정도 되는, 그 순수 조각 미남 앞에서, 비록 곧 유부남 될 사람이라도 꼬리 쳐 볼 생각 안 해 봤을 것 같아?
상상하던 실제로 옮기던, 성인들이 책임져야 할 일을 그걸 왜 제삼자들이 나서서 옳고 그름을 따지려고 하냔 말이야. 내가 그래서 직원들에게 그렇게 정리해서 이미 다 얘기했고 서로 입단속 하자고 말했었잖아.”
나는 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 누구보다 내가 더 P에게 안달이 나 있어. 무슨 소린지 모르지?
지금 그놈이 경쟁사로 스카우트 되어간다는 소문이 윗선에까지 들어갔고 어떻게든 못 가게 잡으라고 난리야. J 부서장은 내 인사평가에 참고할 거라면서 으름장을 놓더라고. 걔가 퇴사하면 난 마이너스 고과란 말이야.
J 부서장에게도 직접 영향이 가기 때문에 매일 나를 쪼는 상황이라고. 그런데 걔를 두고 뭔 징계를 논해!”
P가 그토록 기고만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 배경에 깔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회사에 매우 필요한 존재였다.
그의 개차반 같은 사생활조차도 그의 업무성과 앞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직은 소속 직원 개개인의 윤리, 도덕적인 문제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일반화시키기에는 조심스럽지만, 조직은 보편적으로 성격 좋고 착한 사람보다는 어떡해서든 성과를 내어 돈을 벌어다 주는 직원을 더욱더 원하는 습성이 있다.
그러다 보니 부하 직원들에게 성격 안 좋은 인물로 낙인찍힌 자가 조직을 장악하는 수장이 되기도 하고 임원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회사로서는 무조건 고용된 자를 통해 이윤을 얻는 것이 목적일 뿐 인격이 이윤 창출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여긴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어느 조직이든 단기간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조직의 장이 부하 직원들을 달달 볶아가며 끌고 가야만 원하는 가시적인 성과를 어느 정도 낼 수 있다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더구나 그 결과물이 양적으로 많아 보이는 것만으로도 일을 열심히 한다는 과시로 조직 내에서의 존재감을 충분히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Y 실장은 그런 면에서는 아주 탁월했다.
그와 나는 서로 입사 동기로 같은 해 경력사원으로 입사해 출발을 똑같이 하였다.
내가 실장으로 조직을 이끌어 나갔다가 J 부서장이 Y를 더 신임하면서 그가 내 뒤를 이어 실 조직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당장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가 조직장이 된 이후 업무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직원들의 불만이 높아졌지만, 그는 더욱더 몰아붙였다.
내가 직원들의 업무의 효율성과 자율성을 중시하여 필요 이상의 업무를 의도적으로 차단하고 여유롭게 일을 진행해 나가는 스타일이었다면, Y는 직원 중심보다는 오직 자기중심으로 조직의 임원들에게 어떡해서든 잘 보이려는 성향이 강했으며 권력욕이 대단하였다.
그러다 보니 일 욕심이 너무 과한 것이 흠이었는데, 이것이 종종 직원들의 업무 스트레스를 가중시켰다.
더구나 Y는 조직에서 승승장구하고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선 성과를 잘 내는 업무의 유능함이 있어야만 하는데 그 기본조건으로 아랫사람과 협력사를 잘 쪼아대고 힘있게 다루는 그야말로 갑질을 아주 많이 잘하는 더러운 성격이 필수라 여겼으며, 아울러 누군가가 나를 뒤에서 붙잡아 줄 수 있고 밀어줄 수 있는 든든한 지원군 같은 그런 빽을 가진 것을 금상첨화로 여겼다.
아무리 능력 없고 형편없어도 조직에서 누군가 자신을 든든하게 뒷받침해 줄 수 있다면 그 조직에서 누구보다 오래 버틸 수 있는 것을 내가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런 든든한 버팀목이 없을수록 조직 내에서 잘못된 것을 보아도 큰 목소리 내는 것을 조심하는 것이 좋다.
조직 생활하다 보면 정의로워지고 싶은 순간이 많겠지만 무조건 참아야 한다.
조직에 올바른 소리 하는 사람치고 그 조직에서 오래 버틸 사람은 단언하건대 단 한 사람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직 생활은 정의롭고 착한 사람이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회사 안에서 착하고 정의로운 것이 대인관계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회사 생활하고는 전혀 연관 자체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잘 알고 있음에도 나는 항상 문제 앞에 정의를 먼저 따지려는 습성을 여전히 떨쳐버리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Y 실장! 아무리 그래도 지금 인간적으로 누가 더 힘들어하고 있는지 보면 알 수 있잖아.
P 저 친구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지금도 회사 잘 나오고 있지만, N은 그렇지 못하잖아.
서로 피해자라고 주장하면서 왜 남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회사 잘 나오고 여자는 지금 힘들어하냔 말이야?”
Y 실장은 다시 몸을 뒤로 크게 젖히며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니, 지금 당장은 본인이 나오기 싫다는 것을 내가 뭘 어찌하라고. 너가 이러니 위에서 너를 답답하게 보는 거야. 다른 사람 보지 말고 너만 보라고. 누가 어찌 됐든 결국은 남의 일이고, 그것이 너하고 무슨 상관인데? 그러니 성과가 빨리빨리 안 나오는 것 아니겠냐고!”
나는 그의 말에 어폐가 있는 것 같아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실장직을 면(免)하게 된 나를 은근히 비꼬는 듯한 어투로 느껴져 순간 불쾌해졌다.
“그게 뭔 말이야? 지금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아니, 내 말은……. 아니다. 됐다. 다르게 오해하지 말고, 우리가 누구를 신경 써주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니란 거잖아. 지금 중요한 건 P가 다른 곳으로 이직 못 하도록 너나 나나 최대한 붙잡아 둬야 할 상항인 거고.
N은 좀 인간적으로 안타깝지만 사실상 그냥 내보내야 할 상황인 거야.
직원들 진술도 상당수 일관되고, 지금 여러모로 N에게 불리한 상황이야.”
“뭐가 일관되고 불리한데?”
“우리 부서에서 N을 편들어 줄 사람이 없다는 거야. 그동안 근무복장도 단정하지 못하여 다른 여직원들에 비해 상당히 많이 튀었고 더군다나 남자 직원들에게 먼저 오해 살만한 신체접촉도 많았고……,
아무튼 입사 이후 초반과는 달리 여러모로 평이 좋지 못했어.
그래서 지난번에 외부에서 N을 불러내어 면담했을 때 사직을 권했어.”
“그게 권고사직할만한 일이냐? 계약 기간도 얼마 안 남은 애에게!
복장이나 태도 등이 그렇게 문제 생길만한 일이었으면 미리 주의를 시키고 개선할 기회를 주었어야 했잖아!”
나는 그의 말에 버럭 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회사는 이미 N이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로 규정하고 있어. 게다가 N도 P랑 같은 공간에서 근무하기를 원하지 않고 있어. 더구나 다른 부서도 티오가 모두 차서 지금 당장 다른 데로 발령 내 줄 수도 없는 상황이고.
걔는 완전히 사면초가야. 며칠 안에 스스로 퇴사 결정할 거라고 했으니 앞으로 더이상 얘기할지 말자.
이 건은 그렇게 정리될 거야.”
나는 고구마와 감자 수 개를 물 한 모금 없이 단숨에 씹어 삼킨듯한 답답한 통증이 순간적으로 가슴에서부터 차올라왔다.
그렇게 N이 퇴사를 고민할 즈음 연말이 가까웠고 인사평가 기간이 곧 다가오고 있었다.
Y 실장은 그 어느 때보다 직원들에게 요구하는 일들이 더욱 많아졌고 윗선에 보고하기 위한 가시적 성과물들을 필요 이상으로 만들어 내기를 요구하였다. 그에 따라 나와 후배 H도 덩달아 바빠졌다.
다음 주 초에 임원들에게 보고해야 할 프레젠테이션 자료들을 정신없이 만들다 보니 시간이 많이 촉박하여 특근을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상황이 발생했다.
법정 근무 시간이 철저하게 지켜지는 회사였지만 이처럼 물리적으로 촉박한 시간을 요구하는 업무일 경우 종종 주말 특근이 이루어지곤 하였다.
나의 보조로 참여한 후배 H는 잔뜩 심술이 나 있는 채로 토요일 오후 내내 근무를 하였지만 내가 지시하고 요청하는 대로 너무 잘 따라주어 매우 고마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형, Y가 실장이 되고 나서부턴 직원들 삶의 질이 너무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야. 진심으로 형이 실장이었을 때가 가장 좋았었는데.”
“그러면 뭐해. 나 땐 성과가 개판이었구먼.”
나는 스스로 자존감을 낮추어 후배의 칭찬에 대한 민망함을 조금이라 감추려 하였다.
“그건 그래. 그런데 그 성과라는 게 형이 실장으로 있었을 땐 죄 다 장기적으로 나타나는 일들이다 보니 당장에 성과를 내길 원했던 경영진들이 볼 땐 답답했겠지. 하지만 그 당시 우리가 그렇게 진행한 덕에 지금 와서 초극강 디지털 4D 홀로그램의 상용화를 눈앞에 둔 거 아니겠어?
그런데 지금은 뭐냐고. 허구한 날 쓸데없는 일로 노동력만 착취당하는 느낌이야.
하긴 그 덕에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가 잘 나오니 칭찬은 많이 받아요. 연말에 다른 데보다 우리한테 성과급 엄청 많이 떨어진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앞에 앉아 구시렁거리면서 업무를 하는 H였지만 성과급을 말하면서 한껏 웃음 짓는 표정을 한 그의 얼굴이 가로막고 있는 칸막이를 투과하여 보이는 듯하였다.
그날 토요일 점심부터 시작했던 주말 특근이 다음 날 자정을 넘겨 늦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강도 높게 일을 해야 했던 주된 이유는 Y 실장이 짧은 기간 내에 많은 업무성과를 내고 싶었던 욕심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인원보강 없이 Y 실장이 요구하는 기간 내에 혼자 일을 처리하려다 보니 이처럼 주말 특근에 초과 근무까지 해야만 했다. 그래도 고맙게도 후배 H가 도와달라는 나의 부탁도 없었는데 자발적으로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곁에서 도움을 주어 고마웠다.
새벽 5시를 넘기자 일이 마무리되어갔다.
일요일까지 일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날 야근에 철야까지 해가며 일을 끝내려고 하였다.
그리고 일요일은 오전부터 온종일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마지막 마무리를 하는데 앞에 앉아있던 H의 코 고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H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가 너무도 고마웠다.
사실 이번 프레젠테이션 건은 Y 실장이 매우 중요하게 추진했던 임원진들을 위한 보고였다.
그 일을 내가 맡으면서 최소 한두 명의 직원을 보조파트너로 붙여주길 원했으나 모든 직원이 각자 필요 이상의 일들을 소화해 내고 있어서 Y 실장도 나에게 매우 난감해하며 미안해하였다.
그런 상황에 후배 H가 자발적으로 도와주겠다며 나에게 왔다.
주중에 몇 차례 야근할 때에도 같이 곁에서 도와주었으며 지금 이렇게 나를 도와 주말에 특근까지 모자라 철야까지 해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에게 다가간 나는 책상에 팔베개하고 엎어져 자고 있던 그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이제 다 끝냈다. 정리하고 퇴근하자.”
H가 부스스한 눈으로 일어나 피곤하다는 듯 팔과 다리를 위아래로 쭉 늘리며 기지개를 길게 한번 뻗는다.
“어느새 다 했데? 형 도와주러 왔다가 내가 괜히 방해만 된 거 아니야?
너스레를 떠는 그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난 옥상에 가서 찬바람 좀 맞고 다시 내려오련다. 너도 잠시 올라가서 잠 좀 깨.”
“형 먼저 올라가 있어. 난 나머지 정리 다 하고 화장실 잠시 들렸다 올라갈게.”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피곤함을 신선한 새벽 공기로 깨우는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옥상에 올라오니 아직도 어두운 밤하늘에서 차가운 새벽 공기가 콧속으로 확 들어왔다.
온몸의 세포가 새롭게 숨 쉬며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있는 힘껏 심호흡을 여러 차례 하면서 옥상정원으로 향했다. 옥상 난간에 기대어 밤사이 아내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였다.
아내가 보낸 메시지 안에는 나의 퇴근이 생각보다 많이 늦어진다는 것과 더는 안 기다리고 먼저 잠자리에 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새벽 시간 또 한 통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세 시간 남짓 쪽잠을 자다 깨었고 잠이 안 와 성경책을 읽는다고 했다.
그리고 또 그 잔소리가 오늘도 메시지를 통해 그지없이 이어졌다.
아내는 오래전부터 내가 교회에 다니기를 원했다.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의 환심을 얻는 것이 필요했기에 나는 아내와 연애 시절 아내가 다니고 있던 교회에 매주 같이 출석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뿐이었다.
결혼한 이후 아내와 같이 교회를 나가본 기억이 별로 없다.
하지만 이런 나의 행동을 아내가 탓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내는 그저 매일 나를 위해 기도한다고만 하였다. 그러나 수시로 아내는 나에게 다시 교회 나갈 것을 종용하곤 하였고 나는 항상 아내의 그 말이 잔소리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인가 아내에게 왜 그렇게 열성적으로 교회 다니며 신앙에 열심을 내는지 물어본 적 있었다.
아내의 대답은 사람에겐 영과 육이 있는데 삶이 끝난 후 영이 갈 곳은 천국과 지옥으로 나뉜다는 것이고 오로지 기독교적 구원을 받은 자들만이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은 진정한 빛이 없는 생지옥이라고 말했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힘들게 일을 안 하면 살 수 없고, 또 평생 우리의 삶은 고난과 고통 그리고 걱정과 염려 그로 인한 불안함이 점철되어 누구든지 살면서 이것을 절대 피할 수 없으며 없앨 수도 없으니 이런 곳이 지옥 아니면 뭐냐고 말을 했다.
그리고는 이 세상에서 지상낙원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 대체 어디에 있냐고도 물어왔다.
나는 그 순간 내가 생각하기에도 조금은 우습게도 야자수가 있고 태양이 작열하는 어느 한적한 휴양지를 지상의 낙원으로 곧 떠올렸으나 그곳에 있다 한들 한평생 일도 안 하고 놀고먹으며 유유자적(悠悠自適)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살 수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아내의 말에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하였다.
사실 아내의 말에 전반적으로 일리는 있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죽음 뒤의 세계에 관심이 없었다.
죽으면 그것으로 다 끝이고 아무것도 일어날 일 없을 것이라는 게 내 믿음이었다.
행여 아내가 말한 죽음 뒤의 천국과 지옥이 있더라도 눈에 보이는 물질의 세계에 더 관심이 많았던 나는 사후세계는 그저 관념과 허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내가 하는 일이 인공지능을 통해 로봇에 감정을 만들어 주고 언젠가는 영혼을 불어넣는 꿈을 갖고 있다 보니 이러한 일에 종사하고 있는 나 자신의 자존감이 상당하였고 더구나 내가 곧 살아 있는 창조주라는 자만감이 전혀 없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이것은 나뿐만이 아니고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상당수의 사람이 그렇게 일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감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아내는 이러한 나의 자세에 적잖이 우려하고 있었지만 나는 뭐가 문제 되는지를 몰랐고 아내가 가진 그 믿음이라는 것을 존중은 했어도 결혼 후 내내 아내의 믿음만큼은 이해 못 하고 있었다.
그런 아내는 죽음 뒤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것이라는 나의 믿음에 대해 그 어떠한 것에도 근거를 두지 못한 오직 내가 믿고 싶은 내 마음대로 믿는 근거 없는 믿음이라 핀잔했고 아내가 믿는 기독교의 믿음은 성경을 바탕으로 수천 년 이어져 오면서 현재도 살아 있는 또 근거 있는 믿음이라고 반박하였다.
나는 아내가 말한 내 믿음에 근거 없다는 말에 사실상 그 어떠한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믿는 믿음은 그 어떠한 철학이나 사상에 근거한 것도, 어떤 예언가나 선지자들이 기록한 책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아내가 말한 그 근거라는 것이 이성과 상식으로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선다고 하여도 어찌 됐든 아내의 믿음에는 근거라는 것이 존재했던 반면 나에게는 그러한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 맘대로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을 두고 근거 없는 믿음이라는 아내의 말에는 지금도 그 어떠한 반론도 제기할 수 없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