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장편 - #5 (제1장 불미스러운 일)
<#4에 이어서...>
아내의 마지막 메시지를 읽는다.
‘예전처럼 같이 교회 갈 날을 기다릴게. 우리 가족 모두 빛으로 오신 예수님 만나러 가면 좋겠어.’
‘아, 이 잔소리는 도대체 언제쯤 끝이 나려나’하고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며 새벽공기를 페부(肺腑) 깊숙이 집어 넣어본다. 그리고 그때 얼음덩이와 같은 차가운 난간을 붙잡고 몸을 앞으로 기댄 순간 누군가 어둠을 뚫고 내가 있던 건물의 입구 안으로 재빠르게 들어서는 모습이 순간적으로 보였다가 사라졌다.
“주말 새벽 이 시간에 누군가?”
혼잣말하며 상체를 더욱 난간 앞으로 내밀어 보았지만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옥 안에는 보안요원이 따로 없다. 첨단 보안 로봇과 CCTV가 24시간 철두철미하게 감시를 하고 있었으며 최첨단 기술 유출에 대한 범죄 우려 때문에 이곳의 보안 시스템은 그 어느 곳보다도 철저히 갖추어져서 운영되고 있었기에 지금 이 건물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자는 직원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나는 그래서 더욱 궁금증이 들기 시작했다.
후배 H는 아직 옥상으로 올라오지를 않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엘리베이터 홀로 나가보았다.
이동량이 많지 않은 시간대라 오직 한 대의 엘리베이터만 운영이 되고 있었기에 확인은 너무 간단했다.
내가 내렸던 옥상층에 멈추어 있던 승강기가 다시 내가 근무하던 사무실 층에 머물러 있는 것을 확인했다.
예상대로라면 H가 타고 올라오려는 것일 수 있겠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 보아도 승강기는 사무실 층에 멈추어 있다. 느낌이 더욱 이상하여 나는 내려가 보기로 했고 의도적으로 승강기가 아닌 비상계단을 이용하였다. 내가 있던 사무실이 옥상과 가까운 고층이었기에 사무실 층까지 얼마 걸리지를 않았다.
그런데 육중한 두 개의 방화문 가운데 하나를 열고 마지막 방화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문밖에서 무언가 고성이 오가며 소란이 일어나는 듯한 것을 감지하였다.
더욱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살며시 마지막 방화문을 열고 엘리베이터 홀을 먼저 살펴보니 후배 H와 N이 서로 싸움이라도 하듯 소리 지르며 바닥에 뒤엉켜 있었다.
나는 얼른 달려가 그 둘을 떼어놓았다.
후배 H가 너무 놀랐는지 사색이 되어 떨어져 앉아있었고, 나는 N을 진정시키려고 다가가며 그녀의 상태가 괜찮은지 물어보았다. 얼굴을 확인하려고 내가 그녀의 풀어 헤진 긴 머리카락에 손을 데려고 하는 순간 그녀가 내 손을 거칠게 뿌리치면서 또다시 더 크게 괴성을 질렀고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주저앉았다.
반사적으로 나의 도움을 거절한 그녀의 행동에 나 역시 당황했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넘어져 있는 H를 보며 무슨 일인지 알려달라고 하였다.
H가 정리를 모두 끝내고 불을 끈 후 사무실을 나가기 전 화장실을 잠시 들렀는데 사무실 내에서 무언가 둔탁한 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하여 조심히 나가보니 Y 실장의 자리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그가 확인하기 위해 어둠 속에서 조심히 다가오자 Y 실장 자리에 있던 자가 놀란 나머지 황급히 달아나다가 이곳 엘리베이터 홀에서 H에게 붙잡힌 것이었다.
H가 붙잡은 건 N이었다.
그녀가 놀랐는지 괴성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아 발버둥 치길래 H는 N을 진정시키려고 계속해서 토닥이며 안심하라고 했지만, 그 이후로도 N이 발작을 그치지 않고 지금처럼 저렇게 정신 나간 듯이 소리치며 있다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일단 N을 안정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그녀에게로 조심히 다가가려 했지만, 그녀의 발작에 가까운 모습이 자연스럽게 스스로 진정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잠깐 지켜보기로 하였다. 그렇게 한동안 지켜보는데 드디어 그녀가 안정을 되찾았는지 나와 H를 보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울먹이면서 건넸다.
나는 진정된 그녀를 데리고 사무실로 들어가 자초지종을 들으려 하였다.
그녀는 자리에 앉는 동안까지 계속 나와 H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N은 Y 실장이 말해준 대로 권고사직을 전달받을 상태였고 그녀 역시 더 이상 회사 생활 지속하기를 스스로 원하고 있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P가 나에게 연락해 왔어요. 자기 때문에 회사 그만두지 말라고. 자신은 이미 이직을 결심했다는 거예요. 자신이 회사에 없어 지면 내가 편할 거라고 짐짓 날 위해 주는 듯 말했지만 난 알고 있었어요. 그가 이직하려는 직장이 이곳보다 훨씬 대우가 좋기에 나를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닌 본인을 위해 떠나는 걸 잘 알고 있었어요. 사직을 결심한 후 나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낸 직원들 얼굴 보기 싫어서 일부러 오늘 제 물건을 정리하러 나왔는데 두 분이 여기 계실 줄 정말 몰았어요.”
“그런데 왜 날 보자마자 도망가려 한 거야?”
H가 많이 억울한 듯 N에게 따지듯 물었고, N은 H가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낀 후 너무 놀란 나머지 허둥지둥 자리를 피해 나가려는데 H가 어느새 뒤에 다가와 자신을 확 잡아 세우는 바람에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해명에도 H는 아직도 분이 안 풀렸는지 황당한 표정을 여전히 감추고 있지를 못하였다.
“나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어. 이렇게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착용한 상태에서 검은색 롱패딩을 입고 있으니 누가 제대로 알아보겠냐고. 내가 뒤에서 너무 세계 낚아챈 것도 아닌데 소리 지르면서 주저앉길래 난 그저 안심시키려고 했던 것이고, 그런데도 계속 소리치고 그랬으니 나도 엄청나게 놀랐다고.”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을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무언가를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H와 몸싸움을 벌이고 있던 그 와중에도 손에서 놓치고 있지 않고 줄곧 붙들고 있던 그것은 조그만 마스코트 인형이었다.
“그 인형, 꽤 오래돼 보인다.”
화제를 돌리는 나의 말에 그녀가 그제야 떨구었던 고개를 들고서 나와 H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것 때문에 여기 온 거예요. 내가 쓰던 다른 물건은 다 없어져도 좋은데 이것만은 꼭 필요해요.
오래전에 돌아가신 우리 아빠가 나에게 남겨준 유일한 마지막 생일 선물이거든요.”
나는 그녀가 길게 말을 안 해도 그 추억이 깃든 그녀의 조그마한 마스코트 인형만으로도 그녀가 아빠를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된 듯 보이자 나는 다시 그녀에게 사직서를 내지 말 것을 권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마음을 굳혔다며 짐을 정리하겠다고 말하였다.
다시 자리를 정리하던 H는 어질러진 Y 실장의 자리를 보고는 N에게 농담하듯 웃으며 말하였다.
“아니, 여긴 Y 실장 자리이고, P의 자리는 저기잖아. 왜 여기에서 난동을 피웠냐고.
저쪽 책상을 엎어 버렸어야지.”
그제야 나는 N이 어지럽혔던 Y 실장의 책상을 보았다.
철저한 내부 보안규정 때문에 책상 위에는 퇴근 이후 그 어떠한 물품도 올려놓을 수 없게 되어있었다.
다만 예외로 개인적 비품만이 허용되었는데 Y 실장의 가족사진을 담은 액자가 심하게 깨져있는 것 말고는 특별히 파손된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H가 농담하듯 말한 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녀가 P의 책상에서 소심한 복수를 하려 했는데, 가까이 있던 Y 실장의 책상을 P의 책상으로 착각했었을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실장의 자리와 P의 자리는 사실상 헷갈릴 수 없는 위치였다.
다행히 직원들이 근무하는 사무실 내부에는 직원을 감시하는 용도의 CCTV가 설치될 수 없기에 나와 H가 모른 척하면 문제 될 일은 전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주말 근무 나와서 일하면서 무언가를 찾는 도중 그냥 실수로 잘못 건드려 가족사진을 깨버리게 된 것이라고 Y 실장에게 말하겠다며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으나 그녀는 그럴 필요 없다며 나와 H에게 거듭 미안함을 전하였다.
어느 정도 일이 정리된 듯 보이자 H는 너무 피곤하다며 빨리 집에 가서 잠을 자야겠다 하고는 사무실을 먼저 빠져나갔다. 나는 그녀에게 짐을 다 챙기면 내 차에 싣고 그녀의 집까지 바래다주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녀와 단둘이 사무실에 남았을 때 그녀가 조용히 자신의 짐을 정리하고 싶다 하였다.
집에 바래다주겠다는 나의 제안을 끝내 거부하여 나 역시 사무실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지하주차장에 주차된 차에 가기 전 원거리 제어기능으로 시동을 걸어놓고 히터를 작동시켜 놓았다.
시동이 걸린 나의 차가 미리 입력해 놓은 주행 경로를 따라 자율주행으로 내가 있는 1층 현관까지 오는 것을 기다리며 로비에 있었다.
그리고 그때 N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까는 얼굴 보면서 말씀드리기가 어려웠어요. 그동안 잘 대해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이제 진짜 퇴사하는 사람처럼 느껴지는데. 여기서 있던 일은 빨리 잊도록 노력해봐.”
“저도 그러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되네요.”
“…….”
“지난여름에 제가 새 원피스 사서 처음 입고 온 날, 그날 정말 고마웠어요.
그렇게 알려 주실 수 있다는 그 센스에 다른 여직원들도 모두 감탄했고 하나같이 칭찬을 하더라고요.
사람 무안하지 않게, 그렇게 알려 주신 것에 감사해요. 그때 바로 고마움 표현 못 한 건 정말 창피해서 그랬어요. 옷을 살 때 피팅룸에서 옷 한번 입어보면서 앞 하고 옆만 자세히 보았지 누가 뒤를 볼 수 있겠어요.
그렇게 비치는 옷일지는 정말로 상상조차 못 했어요. 집에서도 가족과 떨어져 자취하니 그 옷 입었을 때 제대로 알려줄 사람은 없었어요.
그걸 입고 출근했고 내내 사무실에서 지냈었다니 지금 다시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그제야 그녀가 그날 퇴근 때까지 줄곧 카디건을 허리에 매고 있었던 모습이 떠올랐다.
“P와는 사실상 사내연애였어요. 정말 좋아하는 오빠였어요. 제가 먼저 오빠에게 접근했던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오빠에게 결혼할 여자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접근했다는 건 전부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회사에는 이미 그렇게 소문이 다 퍼져서 나를 몹시 나쁜 년으로 만들어 놓은 상태였어요.
근데 아무도 날 믿어주지 않아요. 심지어 같은 여직원조차도…….”
그녀의 말이 잠시 끊겼고 나는 뭐라고 해줄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와 텅 빈 로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Y 실장이 연락해 왔어요. 내가 휴가 중이었지만 실장 퇴근하면서 밖에서 잠깐 만나자고요.
이번 일로 급히 면담해야 할 일이 생겼다고 해서 만나러 나갔어요.
실장이 알려준 그 날 약속장소는 회사가 아니었고 가보니 어떤 바(bar)였는데 그곳에 J 부서장과 함께 와 있더라고요.”
“J 부서장이, 왜?”
“나를 채용한 인사권자로써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 버려 난감하고 자신이 회사에서 처지가 아주 곤란해 졌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러면서 그때 어차피 계약도 거의 다 끝나가는 상황이긴 한데 권고사직 얘기를 꺼냈어요. 내가 회사에 너무 안 좋게 인식이 박혀서 더 이상 함께 일하기 곤란할 거란 말을 하더라고요.
나는 정말 억울한데, 근데 내 말을 귀담아들으려고도 안 했어요. 그리고 그 뒤로 그 일이 벌어진 거예요.”
“그 일이 뭐였는데?”
“회사에서 퇴사하면 A그룹 회장 비서실에 취직할 수 있도록 부서장이 특별히 신경 써서 A그룹 회장에게 잘 말해 놓았다고 했고, 마침 그날 자신들이 회장과 미팅이 있는 날인데 사전 면접 보는 셈 치고 같이 회장을 만나보자고 했어요.
그날 그렇게 너무 자연스럽게 만남이 이루어졌어요.
그리고 A그룹 회장 일행과 대면했고 회장이 억지로 건넨 술을 몇 잔 마셨어요. 너무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억지로 술 몇 잔을 마신 기억이 나요. 그런데 그 뒤로 내 몸을 제어하기 하기 힘들 정도로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긴장도 풀렸고 졸음마저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회장을 제외하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방을 나가는 것까지 기억이 나요.”
나는 내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이게 지금 무슨 범죄 영화 속에나 나올법한 얘기인지 놀라웠고 더군다나 이 끔찍한 사건의 피해자인 그녀가 너무도 담담하게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에도 소름이 끼쳐오기까지 하였다.
“이 얘기를 나 말고도 다른 사람에게도 말한 적 있어?”
“아니요. 전혀. 제 말을 입증할 수 있는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 내가 뭘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회장과 단둘이 있었을 때 기억은 또렷한데 반항조차 할 수 없는 몸 상태에서 그렇게 당한 거예요.
거부하고 싶었지만 거부할 수 없게 만들었어요. 내가 내 몸을 통제할 수 없었으니까요.
회장과 함께 있던 방을 어떻게 나왔는지 잘 모르겠어요. 기억이 전혀 없으니…….
그 이후 사람 붐비는 대중교통조차 이용을 못 할 지경이었어요.
누가 내 몸에 닿기만 하여도 그때 그 일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떠올라 나를 힘들게 했어요.”
그녀의 말에 아까 엘리베이터 홀에서 H와 격하게 뒤엉켰을 때 소리를 마구 지르며 경련을 일으켰던 그녀의 모습이 나의 머리를 재빨리 스치고 지나갔다.
“나, 솔직히 지금 듣고도 잘 믿어지지 않아. 이 정도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야. 이건 범죄고…….”
“나도 알아요, 그런데 이것을 지금 입증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니까요, 내 몸엔 그 어떤 흔적조차도 없었기에 더더욱 내가 이것을 말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악몽 같은 순간은 지금도 너무도 선명히 기억에 남아 있어요.
그날 그 방에서 그 일이 있고 잠깐 정신을 잃은 것 같았어요. 눈을 떠보니 Y 실장의 차 안 이었어요.
술도 잘 못 마시면서 왜 그렇게 정신 잃을 정도로 마시냐며 Y 실장이 능글맞은 웃음을 짓는데 그 순간 나는 너무 무서워 차 밖으로 나와 뒤도 안 돌아보고 빠져나왔어요”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것을 어떻게든 입증할 증거를 찾아야만 했다.
“이렇게 통화하지 말고 지금 바로 나하고 만나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하면 좋겠어.
지금 한 얘기가 사실이라면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야. 내가 지금 다시 사무실로 올라갈…….
아니다, 지금 바로 내려올래. 나 지금 1층 로비에 있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지금 당장 그녀가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비록 주말이라 가해자들을 마주칠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곳을 빨리 벗어나게 한 뒤 그녀로부터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면서 해결책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니에요. 나는 지금 갈 때가 있어요.”
“어딘데? 내가 그리고 갈게.”
그 순간 그녀가 쓴웃음을 짓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랑 같이 못가요. 나 지금 누구 만나러 가는 중이니까요.”
나는 그 순간 경찰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건 엄연한 중범죄고, 무조건 사법경찰의 도움을 받아야 할 사안이라는 것을 직감하다 보니 그렇게 나도 모르게 그녀가 경찰의 도움을 받으러 간다는 것으로 생각이 연관되어버린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답변은 나를 순간적으로 당황하게 했다.
“아빠에게……. 갈 거예요. 거기 가면 편하겠지요?
여기에서 일어난 일 모두 다 깨끗하게 잊을 수 있겠지요?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내가 지금껏 알고 있던 많은 남자 중에선 그래도 가장 좋으신 분이었던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대화 나눈 분이 나에게 좋은 분으로 기억에 남아 있는 분이어서 정말 고마워요.
제 얘기 들어주셔서 정말 고마웠어요.”
통화가 끊겼다.
텅 빈 로비 안, 나지막이 울려 퍼지던 그녀의 목소리가 끊기자 무거운 적막이 감돌았고 나는 그녀의 마지막 말에 너무나 당황스러워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어느새 나의 차는 1층 로비 현관 앞에 얌전히 주차된 채 조용한 엔진 소리와 함께 내가 얼른 승차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밖에서 무언가 둔탁하게 바닥에 퍽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새벽 여명을 가르고 내 귓가를 할퀴고 지나갔다.
나는 반사적으로 현관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리고 약간 멀리 떨어진 곳에 검은색 패딩 점퍼를 걸친 무언가가 힘없이 바닥 위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급히 그곳으로 뛰어 달려가는데 내 발에 무언가 밟히면서 심하게 으스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멈칫하며 뒤돌아보니 아까 그녀가 두 손으로 사랑스럽게 매만지며 꼭 필요하다고 했던 마스코트 인형이 내 발에 짓밟혀 으스러져 있었다.
희미하게 밝아오는 그 날 새벽, 그때 내 입에선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도 모르는 욕 들을 허공에 대고 마구 내뱉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