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 경장편 - #7 (제2장 타나토스)

by Johann

<#6에 이어서...>


제2장. 타나토스(Thanatos)


퇴근 무렵 기온이 급강하하면서 오후부터 내리던 비는 어느새 눈으로 바뀌었다.


퇴근을 서두르는 내 모습에 직원들도 이해한다는 눈치였다.

나는 다른 직원들 보다 먼저 서둘러 급한 마음으로 차를 몰아 그가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그 사건이 터지면서부터 그의 심리상태는 내가 멀리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위태롭고 불안했었다. 하지만 그가 내 눈에서 사라진 이후 그의 행적을 알 수 없던 나는 그에게 어떠한 도움의 손길을 줄 수도 없었고 어쩌면 나 스스로가 그의 도움을 회피하려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목적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에도 내릴 생각은 하지 않은 채 SNS에 그가 남긴 그의 마지막 상태 메시지를 다시 한번 보았다.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메시지 위의 배경화면은 빛 하나 없는 어두운 우주 공간으로 보였지만 그곳을 떠도는 먼지 입자들이 마치 성운(星雲)을 연상케 하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너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괜스레 비슷한 노래 제목의 80년대 유행가가 갑자기 떠올랐다. 이런 내가 더욱 싫었다.


마침내 그의 영정사진을 마주했다.

최근 몇 달간 그에게 벌어진 상황은 분명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평소 모습대로 당당하게 잘 극복해 낼 줄 알았는데 그렇게 스스로 생을 정리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그만큼 내가 그를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은 아닌가 싶다.

유가족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그들의 눈을 바라보기가 너무 힘들었다.


조문을 마치고 다른 문상객들과 섞여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직원들도 조문을 끝내고 속속 나에게로 온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직원이 도착을 못 하였다.

내리던 비가 퇴근시간대에 갑자기 함박눈으로 뒤바뀌면서 도심지의 도로가 일대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런 혼잡스러운 가운데 순식간에 도로는 주차장으로 변해 버렸다. 대중교통이 아닌 차를 가지고 오는 직원들이 많았으므로 그들을 더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영정 속의 H가 아직도 해맑게 웃고 있다.

그가 지금이라도 당장 내 곁에서‘형!’하고 나를 부를 것만 같았다.

그는 나하고 10년이나 나이 차이가 났지만, 지금의 회사로 이직하기 전에 대기업에서 같이 근무한 적이 있었다. 해맑아 보이는 신입사원 하나가 그 당시 우리 팀으로 왔는데 내 직속 대학 후배인 것을 알게 되었고 유독 싹싹했던 그를 내가 매우 잘 돌보아 주었던 기억이 난다.


언제부터인가 H는 나를 친형 이상으로 대해왔고 내 동생보다도 한참이나 어렸던 그가 나에게 존댓말 대신 말을 놓았던 회사 내 유일한 직원이었다.

그만큼 나를 잘 따랐고 좋아하였다.

나 또한 그런 그가 싫지 않았기에 그가 버릇없이 군다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신입사원의 때를 막 벗고 조직의 유능한 일원으로 급성장하고 있던 어느 날 퇴근 무렵 사무실을 총총히 빠져나가려는데 그가 나를 다급하게 부르며 붙잡았던 적이 있었다.


“형, 형! 그냥 가지 말고 배지 좀 빌려줘!”


“뭐? 무슨……?”


그가 내 양복 왼쪽 가슴에 있던 회사 배지를 가리켰다.


“아 글쎄 잃어버려서 새로 신청해놓았는데 아직도 못 받았단 말이야. 근데 오늘 저녁에 여자를 소개받아서 만나러 가야 하거든. 상대방은 내가 누군지 아직 몰라. 그래서 그것 좀 달고 가려고.”


해맑게 웃으며 부탁을 하던 그의 청을 나는 굳이 거절할 이유와 명분이 없었다. 그래도 나로서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여자 소개받아 만나는데 이게 왜 필요해? 어차피 통성명하다 보면 너가 어디서 뭔 일을 하는지 자연스럽게 다 알게 될 텐데, 굳이…….”


“형은 이미지 메이킹도 몰라? 그냥 첫 만남부터 아무 말 없이 대기업 사원이라고 조지고 들어가는 거야. 말이 필요 없어. 그냥 이거 하나로 다 해결돼.”


그가 낄낄거리며 웃는 것을 보며“그래, 이거 달고 열심히 조져라.”하고는 가슴에 달고 있던 배지를 툭 떼어서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의 곁을 지나치면서 피식 웃으며 흘리듯 한마디 더 했다.


“미친놈.”


그가 내 등 뒤에서 낄낄대고 웃었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이 이어졌다.

그렇게 사소한 것에서도 나는 후배 H에게 고마운 존재였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 더욱 고마워했던 것은 지금의 회사가 인재영입을 추진하던 단계에 그를 스카우트할 수 있도록 내가 적극적으로 그를 추천했던 일이다.

그가 조직에 필요한 우수 인재라는 사실을 나는 어떤 미사여구보다도 그의 실사례들을 들어가며 내가 있던 부서에 영입시키기 위해 참으로 부단한 노력을 했었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보다도 자신감이었다.

“너 이거 할 수 있겠냐?”라는 질문이 떨어질 때마다 그의 머뭇거림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항상 “네 할 수 있습니다.”였다. 하지만 나는 그가 할 수 없을 거라 여겼다. 왜냐면 그의 경력에 비추어 그 일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일단 해보겠다는 말이 먼저 나왔지 못한다거나 잘 모르겠다는 등 우물쭈물 주저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너 이거 해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런 대답이 술술 나와?”라고 하면 전혀 기죽지 않은 모습으로 “신입이 처음부터 해본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어차피 제가 안 하면 선배님이 하셔야 하지 않나요? 그런 일 안 하시도록 회사가 저 같은 사람 뽑은 것 아니겠습니까?”라며 맞받아쳤다.

어찌 보면 건방져 보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그런 그의 당당함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그가 조직에 들어온 후 5년째 되었을 때 최고조를 찍었다.


후배 H와 조직의 낙하산 인사 L 상무와의 마찰은 그 당시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다.

지금 회사의 J 부서장과 Y 실장의 나쁜 점만 모두 합쳐 놓은 인물이 바로 L 상무였다.

대기업의 별인 임원이 되고부터는 그의 성과지상주의 원칙이 극에 치닫고 있었다.

그는 지독한 일 중독자였다.

임원이 되기 전부터 그가 회사에 있는 시간은 평균 12~14시간으로 하루의 절반 이상을 일로 보냈다.

그리고 그런 초과 근무를 일에 대한 열정으로 포장했으며 부하 직원들에게도 항상 자신처럼 일할 걸 강요하였다. 업무의 성과는 무조건 질보다는 양으로 귀결되었다.


그의 지시로 조직원들은 분기마다 엄청난 양의 보고서들을 만들어 내야 했으며, 그는 두껍게 제본되어 만들어진 성과물들을 가지고 실적보고에 이용하려 했다.

그렇게 부하 직원들이 그 한 사람을 위해 혹사당하는 듯 여겨졌다. 대기업 임원 자리까지 앉혀준 그 은혜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L 상무는 예정에도 없던 CEO 보고를 마치 자기가 독대하여 직접 보고하는 것처럼 직원들 앞에서 거짓으로 꾸며서 물리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은 기간 내에 각종 현안에 대한 개선책과 기술적 데이터를 엄청난 양의 첨부 자료로 요구한 적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


그 모든 일이 건설적이면서도 실용적이었다면 직원들도 불평불만이 없었겠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필요 이상으로 업무량을 늘리다 보니 다분히 눈에만 보이는 성과를 만들어 내는 데에만 급급했고, 짧은 기한 내 업무를 끝내야 했기에 직원들 모두 오래전부터 피로도가 상당히 누적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불만에 대해 누구도 L 상무에게 직언하는 경우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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