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장편- #8 (제2장 타나토스)
<#7에 이어서...>
직원들 사이에서 자체적으로 업무 개선책을 만들어 놓았고 이것을 팀장이었던 나에게 갖고 와 보고해보자고 하였지만, 이것을 그대로 보고할 직원이 없었다.
L 상무가 이 개선책을 접하는 순간 그의 합리화 작전에 휘말릴 것이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합리화 작전이라는 것은 L 상무가 즐겨 사용하는 대화 수법으로 자신의 잘못과 단점을 지적하여 시정을 요구하거나 비판을 가했을 때 그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정당화하려고 무진장 애를 쓴다는 점이다.
타고난 언변이 있었기에 한참을 자신에 대해 정당화하면서 자신을 방어하는 듯하다가 어느 시점에 자신의 잘못과 단점을 지적한 상대방을 나무라는 투로 화제를 돌려버린다.
정말 기가 막힌 화술이다.
그러다 보니 L 상무의 잘못을 지적하러 왔다가 어느 순간 되려 지적받는 꼴이 연출이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직원이 있거나 마음에 안 드는 직원이 있으면 직접 그 해당 직원과 소통하여 문제를 풀어나가려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직원 앞에서 그 직원의 흉을 보거나 형편없는 직원으로 폄훼하여 조직 내에서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평가절하하는 등 이간질에 아주 능통한 자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함부로 그와 어떤 논쟁을 벌이거나 뭔가를 지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를 키워준 CEO에게 그랬듯 그는 자기 밑의 부하들도 그에게 손바닥 비벼가며 알랑방귀를 연신 뀌고 예스(yes)를 외치는 그런 예스맨(yes man)만을 곁에 두려는 습성이 있었다.
이러다 보니 그와의 소통은 완전히 불가능했고 임원으로 승진한 이후 그전보다 더욱 그의 안하무인 격 행동과 살인적인 업무요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는데,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고 했던 직원이 바로 후배 H였다.
그가 팀원 간에 소통하며 정리한 효율적인 업무 개선책을 가지고 L 상무 방에 들어가고 나서 오래지 않아 몇 차례 고성이 흘러나왔다.
L 상무의 입장은 조직 내에서는 절대 개인적 감정을 가지고 일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인간적인 어떤 감정에 우선하여 직원들 개개인의 개인적 성향과 처지를 일일이 봐줘 가며 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직원들의 이런저런 편의 다 봐줘 가면서 실적을 쌓을 수 없다는 것이었고 오로지 상명하복의 조직문화 만이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H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엄연히 법정 근무 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L 상무의 초과 근무 시간을 기준으로 개인의 업무성과와 연계시키면서 직원들에게까지 강요하는 건 부당한 상명하복 문화라며 맞섰다.
L 상무는 자신은 절대로 그렇게 말한 적 없다며 발뺌했다.
그러면서 ‘내가 이 회사 사장이다’라는 마인드를 갖고 그동안 열심히 일해왔다면 열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 근무 시간이 도대체 무슨 문제가 되냐며 오히려 역정을 내었다.
너희들이 그렇게 썩어빠진 정신상태로 오로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만 하고 앉아있으면서 꼬박꼬박 월급 받아가니 회사가 요 모양 요 꼴이라며 팀의 업무성과가 저조하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이런 식의 그의 반응은 절대 놀랍지 않다. 왜냐면 그가 불리한 상황에서 항상 그렇게 거짓과 변명, 그리고 호통으로 일관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날 대화에서 L 상무는 한가지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계속되는 H의 효율적 업무개선과 시정요구에 L 상무는 H의 일부 업무성과를 매우 부정적으로 부풀리면서 그를 저평가했고, 이에 H는 일이나 똑바로 하고 나서 상무인 나에게 이런 요구를 하라는 식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이러다 보니 H가 격분하여 발끈하며 더욱 거세게 L 상무의 비인격적 사례들을 거론해가며 계속 몰아붙이자 L 상무가 “너는 어찌 그리도 당당할 수 있냐”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
러고 나서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을 그가 분을 못 이겨 H에게 하고 말았다.
“그렇게 일하기 싫으면 당장 나가버려!”
격한 소리로 내뱉은 L 상무의 말에 H 역시 기죽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래, 나갑니다! 나갈 겁니다!”
H가 L 상무의 방을 신경질적으로 나오면서 문이 열리자 그 안에 온갖 독설을 머금고 갇혀있던 뜨거운 열기가 사무실 안에 훅하고 퍼지는 듯하였다. H가 문고리를 잡은 채 L 상무를 뒤돌아보며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갈 때 나가더라도 이 한마디만 더 할게요. 저는 다만 효율적으로 일하자는 개선책을 들고 와서 상무님과 건설적인 얘기를 하려 했을 뿐인데, 그것이 내가 회사를 나가야 할 직접적인 사유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팀원들은 모두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돌아온 H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 방에 누가 들어갔어도 지금 H의 모습이 되어서 나올 것이라 모두 예상했기 때문이지만 한편으론 아무도 할 수 없었던 말을 H가 솔선수범해서 한 뒤 대신 매를 맞은 것 같아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H가 나오자마자 즉시 L 상무의 여비서로부터 나에게 연락이 왔고 당시 팀장이었던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그의 방으로 가야 했다.
“H 나간단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퇴사한다고 그러니 빨리 대체인력 알아보도록 해.”
더이상 그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내부인트라넷 사내규정에 접속해서 직속 상관에게 하극상 보인 것에 대해 H를 징계할 죄목을 빨리 찾아보라고 지시하였다.
H가 그렇게 혼자 총대를 메었었다.
우리 팀 전체를 평가할 인사권자였던 L 상무는 팀원들이 자신에게 사실상 반기를 들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H는 개인적으로 근무환경 개선책을 제안하는 것이라고 L 상무에게 처음부터 말하였는데, 팀 전체가 당하게 될 혹시 모를 불이익을 H 혼자 고스란히 감수하려 했던 것이었다.
조직 내 임원으로서 그 정도로 부정적인 소리를 아래 직원에게 들었다면 문제를 자각하면서 조직문화 개선책을 논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을 텐데 그는 오히려 자기의 잘못을 지적하고 조직문화 개선을 요구한 직원을 징계하려 한 모습만 놓고 보아도 그는 애초부터 임원의 자리에 앉을 깜냥이 전혀 안 되었던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H에게 미안했다.
팀장인 내가 L 상무와 면담을 해야 했고 팀원들의 요구사항들이 반영되든 안 되든 내가 직접 L 상무를 만나야 했는데, 사실 불 보듯 뻔한 부정적인 상황을 일부러 맞닥뜨리기 껄끄러웠던 것이 감출 수 없는 진실이었다.
“너한테 미안하다. 팀장이 못나서……”
멋쩍게 웃는 내 앞에서 H는 오히려 환하게 웃었다.
“이런 일 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 다 알아. 너무 신경 쓰지마, 형.”
“저 양반이 너 나간다고 하던데 무슨 말이야? 혹시 정말 퇴사한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나가길 어딜 나가. 내가 나간다고 했던 건 저 답답한 상무 방을 나간다는 것이었지!”
그가 호탕하게 웃어넘겼다.
“L 상무는 그렇게 얘기 안 하던데. 너 나가니 대체인력 빨리 알아보라면서 널 징계할 사유를 빨리 찾으라고 난리더라.”
“내가 잘못한 건 없어. L 상무도 내가 퇴사 안 할 거란 걸 잘 알 거야. 나를 징계 먹일 궁리나 하고 있으니 좀 더 두고 보자고. 지금까지 저렇게 자기 앞에서 거침없이 자신의 잘못들을 솔직하게 말했던 직원이 여태까지 나밖에 없었으니 충격 좀 상당히 받았을 거야.
곁에서 살랑거리면서 예스, 예스만 외치던 사람들만 봐오다가 내가 오늘 노우 라고 외쳤으니 아마 넋이 안드로메다까지 날아갔을걸.
대기업 임원 되기 참 쉬워.
저런 비인간적인 사람도 대기업 임원이라고 깝죽거리며 명함 찍고 다니는 세상이니.”
“원래 회사가 보는 인사(人事)는 따로 있는 법이야.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
조직 생활은 결코 인성 좋은 착한 사람 기준이 아닌 거 같다.”
H를 위로하려는 말이었지만 내가 그리 말해놓고도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