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장편 - #9 (제2장 타나토스)
<#8에 이어서...>
H의 일은 그날 이후 회사에 암암리에 퍼져 나갔고 직속 상관이자 인사권자인 회사 임원을 상대로 맞짱을 뜬 용감한 직원이라는 타이틀까지 얻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날 H는 다시 L 상무 방으로 들어갔다.
불리어 간 게 아니라 스스로 찾아간 것이었다.
징계 운운했던 L 상무 앞에서 H는 한술 더 떴다.
상무 방에서 오고 간 대화 내용을 전 조직원들에게 똑바로 알리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하루빨리 회사 인사위원회에 넘겨서 징계절차를 공식적으로 논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뿐만이 아닌 팀원들 모두 그의 이런 당당함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어찌도 그리 당당하냐’는 L 상무의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나는 여러 날 사내인사규정을 뒤적였고 H를 징계할 수 있는 내용을 살펴보았으나 전혀 없었다.
오히려 L 상무가 찾아보라고 해서 그것도 지시사항이라고 수일간 뒤적여 본 내 모습이 초라하고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결국 나는 L 상무에게 H를 징계할 아무런 조항도 찾을 수 없다는 보고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 일은 그렇게 유야무야(有耶無耶) 흘러가다가 그해 연말 CEO가 퇴사하고 그와의 연줄로 낙하산 인사가 된 L 상무 역시 그다음 해를 끝으로 더는 버티지 못하고 퇴사하였다.
L 상무와의 격한 충돌이 있던 그 날 이후 몇몇 직원들은 L 상무가 H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예상을 하였다. 그들은 H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싶었는지 하나같이 이구동성으로 끝까지 버티라고 응원하였다.
개중엔 누가 회사 더 오래 다닐지는 겉으로 봐도 정규직인 H가 유리하니 L 상무의 겁박에 절대 신경 쓰지 말라고도 조언하였다.
H는 사실상 그러한 조언들과 격려가 필요 없을 정도로 씩씩하고 당당했다.
그리고 그가 드디어 직원들의 말처럼 L 상무보다 회사를 더 오래 다니는 승자가 되었다.
화려한 배웅 없이 퇴사 마지막 날 이제 다른 이에게 넘겨줄 자신의 방을 정리하고 떠나는 L 상무의 초라한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H를 힐끗 보았었다.
그가 무슨 상념에 잠겼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내가 느꼈던 그 감정 아마 그대로였지 싶다.
기껏, 고작 저런 뒷모습이나 보여주려고 몇 수십 년도 아닌 몇 년을 부하 직원들 닦달하며 본인만이 옳다고 그리 설쳐대면서 조직 생활을 해야만 했는지 그저 안타까울 노릇이었다.
그러면서 이 조직에서 언젠가는 떠나가야 할 나의 뒷모습은 어떨까를 상상해 보면서 묘한 감정이 내 어깨를 짓누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신입사원 때부터 내가 지켜봐 왔던 H의 그런 모습은 당당함과 책임감 그리고 친화력은 물론 솔선수범까지 두루 갖추었고 업무 처리가 우수하다 보니 후배라는 학연 관계를 떠나 그를 신뢰하고 신임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영원히 당당할 것만 같았던 영정 속 그가 아직도 해맑게 웃고 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더욱 실감 나지 않았다.
한참이나 어려 보이는 그의 딸아이가 아빠의 죽음을 아직 모르는 듯 H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며 아빠, 아빠 하면서 그 아이 역시 J를 따라 해맑게 웃고 있었다.
조문을 마친 직원들이 하나씩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한 번 더 보려고 멀찍이서 그의 영정사진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그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외주차장에 주차된 차로 걸어가는 동안 더욱 거세어진 눈발이 그칠 기세를 모른 채 휘몰아치고 있었다.
직접 운전하려고 일부러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차에 시동을 걸고 히터로 차 안의 온도를 급속히 올리고 있었다.
술에 취하지 않았지만, 얼굴이 금세 화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긴 날숨을 한번 내뱉고는 그대로 운전석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히면서 벌렁 누워버렸다.
차 안의 더운 공기가 내 몸을 데우고 있었다.
나른해 지면서 급기야 조금씩 졸음이 몰려오려고 했다.
그 순간 왠지 자꾸 H의 영정사진이 눈앞에 어른어른했다.
그리고 좀 전에 나오면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웃는 얼굴이 나를 노려보던 얼굴로 다시 뒤바뀌면서 내 가슴을 아프게 후벼 파고 있었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인간에게는 생존본능과 함께 죽음의 본능 곧 타나토스(Thanatos)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을 기억한다.
서로 대립 되는 삶과 죽음 두 개의 본능이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한다고는 하지만 타나토스가 자살을 미화하는 또 다른 단어의 선택이 되는 것 같아 불편했다.
타나토스가 갖는 정신분석학적 이론으로서의 죽음의 충동이 생존본능인 에로스와 극한의 상황에서 만난다는 지극히 형이상학적 관계 정의를 떠나 그 어떠한 자살도 단순히 본능이라고 단정 짓고 넘어가 버릴 정도로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다.
자살은 그냥 자살인 것이다.
극한의 고통과 우울감 속에서 살고 있던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인 것이다.
그래서 그 선택의 결과가 해방감을 안겨다 준다면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과연 그럴지는 누가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이며, 또 그것을 확실하게 증명까지 해줄 수 있냐는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자살은 결코 도피가 될 수 없고 최후의 위험한 모험이 돼버린다.
해방감을 맛보기 위한 계획으로 자살은 매우 위험천만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에게 닥친 불안함을 없애려는 본능 타나토스를 지배하지 못한 것은 너무나도 본능에만 충실한 삶을 살다 가는 것이 아닌지 나는 이에 아무런 생각도 더 이상할 수 없었다.
내 곁에 함께 있었던 친한 후배의 죽음을 그렇게 단순히 타나토스로 이해하고 해석하려 했던 나 자신을 책망하며 그렇게 오래도록 너무나도 힘들어하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얼마 동안을 차 안에 그대로 누워있으면서 복잡다단한 신변잡기의 생각을 이리저리해가며 잠깐 졸았던 것 같다.
갑자기 지축을 뒤흔드는 엄청난 폭발음과 스키드마크 소리를 신경질적으로 내며 급정지하는 차량의 소리가 연달아서 여러 차례 내 귀청을 찢고 지나갔다.
너무 놀라 몸을 반사적으로 일으켜 세운 뒤 비틀거리며 차 밖으로 몸을 내밀고 빠져나왔다.
아까보다는 한결 눈발이 약해졌으나 여전히 눈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고 이면도로는 온통 눈으로 뒤덮인 채 온 세상이 급속하게 얼어붙고 있는 듯했다. 비몽사몽 간에 바라본 바로 앞 교차로에는 수많은 차량이 얼어붙은 눈길에 미끄러져 연쇄 추돌이라도 한 듯 수십여 대가 뒤엉켜 있었다.
나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리고 왜 내가 그리로 가려 했는지 잘 모르겠다.
사고현장으로 서서히 다가가 보니 여러 대의 차량이 도로 위에 정신없이 엉켜 있었고, 차에서 튕겨 나온듯한 사람들과 횡단보도를 지나가다가 미끄러진 차량에 치인듯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얼어붙은 도로 위에 처참하게 마구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불이 붙은 거대한 탱크로리 한 대가 전복되어있는 것도 보았다.
나는 아직도 비몽사몽이었지만 다친 사람들을 무조건 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교차로 사고현장 앞에 진입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엄청난 폭발음이 불이 붙어있던 탱크로리 차량에서 들려왔다.
이내 거대한 시뻘건 불기둥이 발생하면서 그것이 순간적으로 하늘로 솟구쳤다가 내 앞으로 확 덮쳐 왔다.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그만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는데 그때 어딘가에서 “형!, 형!, 형!” 하며 나를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매우 익숙한 그 목소리에 너무 놀라 다시 고개를 드는데 거대한 불기둥 속에서 H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내 앞으로 거대한 버스 한 대가 굉음을 내면서 달려오다가 급브레이크를 잡으면서 미끄러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또 한 번의 폭발음이 바로 곁에서 연속으로 내 귀를 강타했다.
나는 그 모든 위협적인 소리에 놀라 뒷걸음질 치다가 얼어붙은 도로 위에 미끄러져 그만 중심을 잃고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러면서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뒤통수가 얼어붙은 도로에 강하게 부딪혀 깨지는듯함을 느꼈다.
차량이 뒤엉킨 도로 위에서 교통경찰관들이 쉴 새 없이 호루라기를 불며 교통정리를 하였지만 이미 엉킬 대로 엉켜버린 차량 들과 정체된 도로 위의 차량을 원활히 소통시키고자 몇몇 교통경찰관들이 수신호로 정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소방차와 경찰차 그리고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뒤섞이면서 정신없이 울려 퍼졌다.
드디어 거대한 화염에 쌓인 탱크로리 위로 소방차가 살수를 시작하자 엄청난 양의 연기를 내뿜으며 화염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빨리빨리! 빨리빨리!”
여기저기서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구급대원들이 도로 위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에게 쏜살같이 다가가 생사를 확인하고는 이내 심폐소생을 시행하고 있었다.
“여기요! 여기! 빨리빨리!”
다급한 외침을 듣자마자 구급대원들이 들것을 들고 반듯하게 누운 남자 곁에서 고개를 살짝 젖혀 기도를 확보하고 있던 경찰관에게 뛰어가고 있었다.
그 남자의 귀에서는 시뻘건 피가 흐르면서 눈이 내린 도로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맥박은 뛰는데 의식이 전혀 없습니다.”
경찰관의 다급한 말에 구급대원들이 누워있는 남자의 상태를 살피면서 TBI로 의심된다며 그 남자를 들것에 조심스럽게 옮겼다.
무거운 어두움이 서서히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