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종일 후덥지근하던 날씨가 주말 밤이 다가오는 시간까지 꺾이지 않고 있었다. 장마가 언제 시작됐고 언제 끝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이상한 여름이다. 봄비마저 귀했었고 그래서 건조한 날씨는 작은 불씨에도 큰불로 이어지곤 했다. 지방 곳곳에서의 산불이 그러했다. 비를 못 본 지 꽤 오래다. 역대 최악인 지독한 가뭄이다. 우리나라 기상관측 이래 강수량이 가장 적은 해를 기록하고 있다며 언론은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에 관한 이야기로 연일 야단법석이었다.
얼마 전 내가 거주하는 아파트의 에어컨 사용증가로 늦은 저녁 시간에 정전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느닷없이 끊긴 전력공급에 아파트 주민들이 모두 단지로 나와 바람 한 점 없는 단지를 서성이며 애꿎은 경비아저씨만 탓하고 있었다. 나와 아내도 갑자기 일어난 정전사태에 놀라 단지에 나와 주민들의 말에 귀를 쫑긋거려보니 노후화된 아파트 설비로 인해 전력공급 과부하가 발생했고 그로 인해 송전 연결 장치가 녹아내렸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돌았다.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정전사태를 막기 위해 가정마다 한 개의 에어컨만 사용하라며 그마저도 홀수 층은 홀수 시간에 짝수 층은 짝수시간에만 사용을 권장했다. 그러고도 전력안정이 되지 않으면 사용량 많은 저녁 동안 강제로 단전하겠다는 관리사무소의 고육지책(苦肉之策)이 있었다.
그나마 단수는 안 해 다행이라 여기며 나는 샤워라도 해서 몸의 열기를 식히려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 헤드에선 미지근한 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그냥 이대로 밤새 물을 맞고 싶었다. 그런데 아내가 욕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건 바로 그때였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나를 다급하게 부르고 있었다.
“오빠, 오빠, 오빠, 오빠, 오빠, 오빠!”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수도꼭지를 잠그고 눈을 비비며 아내를 보니 휴대전화 불빛에 잔뜩 상기되어 있는 얼굴이 보였다.
“비비비! 비가 온대! 방금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댔어! 오빠 빨리 나와. 우리 비 맞으러 가자!”
나는 지금 비가 오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내가 보여준 휴대전화 화면에는 강원도 일부 지역일 뿐이었다.
그것도 늦은 밤 대기 불안정으로 강원도 일부 지역에 국지성 소나기가 잠깐 올 수 있다는 예보였다. 나는 기운이 빠졌지만, 아내는 계속 졸라댔다. 열대야로 잠도 안 올 텐데 시원한 차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강원도로 비를 맞으러 가자는 아내의 제안에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나는 너무 간절하게 원하는 그녀의 눈을 보자 차마 거절을 못 하고 말았다. 어차피 잠 못 이룰 밤이면 열대야를 피해 동해안이나 대관령 어딘가에 잠시 있다 오는 거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아내는 빗속에 샤워하겠다며 마냥 들떠 있었다.
차에 오른 나는 내비게이션 목적지를 어디로 설정해 놓아야 할지 잠시 망설이는데 아내가 내비게이션을 끄고 가자고 했다. 정확히 강원도 어느 지역에서 국지성 소나기가 내릴지는 아무도 몰랐다. 나는 엄청난 길치이다. 더구나 밤눈이 어둡다. 그런데 아내는 도로 표지판에만 의지하자고 했다.
일단 집에서 가까운 서울양양고속도를 타고 달렸다. 나는 내심 불안했지만, 아내는 목적지를 정해놓고 가면 막상 목적지에 도착해서 비를 못만 날 수도 있다는 논리를 폈다. 강원지역 여기저기 누비고 다녀야 비를 만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니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마음 내키는 아무 곳에서 그냥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국도로 달려보자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속초를 목표로 진부령과 미시령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이미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때부터 서서히 발생하기 시작했다.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났고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로 들어왔다. 이때부터 도로 표지판은 나에게 무용지물이었다. 낯선 이정표의 지명은 나와 전혀 상관없었다.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달릴 뿐이었다. 열대야를 피해 소나기를 맞으러 이곳까지 왔지만 어디로 가야 비를 실컷 맞을 수 있을지 알 길이 없었다.
인적은커녕 오가는 차량이 한 대도 안 보이는 적막한 밤의 도로를 한참 달리고 또 달렸다.
어느 마을인지 모르게 민가가 조금 보이다가 어느 순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얕은 오르막을 오른다는 기분이 들었는데 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 차체가 정신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포장도로였다. 길은 차 한 대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좁았다. 더구나 야산으로 둘러싸인 듯 차 안에 있어도 스산함이 감돌았다. 나는 조금씩 짜증이 밀려왔다. 괜히 늦은 밤에 차를 끌고 쓸데없이 이곳까지 온 것 같아 후회가 살짝 들려는 찰나에 조금 긴장해 보이는 아내의 옆모습이 보였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아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전조등을 껐다. 순간 암흑이 펼쳐졌다. 나는 갑자기 헤드라이트가 나갔다며 놀라는 척을 해댔다.
장난하지 말라며 아내가 실내등을 켜는 순간 무언가 쿵 하며 차체 밑바닥을 긁는 엄청난 충격음이 전해졌다.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우리 둘은 너무 놀라 한동안 서로를 쳐다만 보았다. 그제야 나는 다시 전조등을 켰다. 이미 어느 야산 꽤 깊은 곳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뒤돌아보니 붉은 후미등만이 뒤를 밝히고 있었다. 아무래도 도로에 있는 큰 돌덩어리에 차체 밑바닥이 닿은 거 같았다. 많이 놀란 나와 달리 아내는 천연덕스럽게 또다시 새로운 제안을 해왔다. 자기가 직접 운전해보고 싶다는 거였다.
아내는 장롱면허다. 마지막으로 운전대를 잡아본 게 운전면허시험장이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운전석을 양보했다. 아내는 몸이 기억한다며 직진 구간을 거침없이 내달렸다.
‘몸이 기억하면 무서운 건데’라는 어떤 라디오 광고카피가 떠올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내의 표정이 불안해 보였다. 룸미러를 힐끔거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떨렸다.
“나 아까부터 이상했는데 우리 뒤로 누군가 자꾸만 따라오는 것 같아.”
다급히 뒤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안 보였다. 그래도 아내는 어둠 속에서 어느 차 한 대가 계속 우리 뒤를 따라오는 거 같다며 불안해했다. 내가 다시 운전대를 잡겠다고 말했지만, 아내는 공포에 떨면서 차를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후드득 하면서 보닛을 때리는 빗소리가 났다. 그리고 동시에 하늘이 두 쪽 나듯 하얀 섬광 하나가 갈라져 나오더니 세상이 환하게 밝아졌다가 어둠에 잠겼다. 드디어 비가 온다고 내가 말하자마자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귀청을 찢는 천둥이 일었다. 그 소리에 놀라 아내는 비명과 함께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면서 아까 번개 치면서 룸미러에 어느 차 한 대가 바로 뒤에 와 있는 걸 보았다며 공포에 잠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장난치지 말고 어서 나가서 그렇게 원하던 비를 맞으라며 연신 깐죽거렸다.
비는 더욱 거세게 내리퍼붓고 있었다. 아내는 도저히 운전 못 하겠다고 했다. 내가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아내가 말렸다. 어둠 속에 아직도 누군가 있는 것 같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차 안에서 바꾸자고 애원하다시피 했다. 아내가 너무 그러자 나도 갑자기 불안해졌다. 아내가 원하는 대로 차 안에서 위치를 힘겹게 바꾸는데 순간 아내가 룸미러로 다시 한번 무언가를 본 모양이다. 조수석으로 몸을 옮기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좁은 차 안에서 우리 둘은 그렇게 한 몸이 됐다.
바로 그때 운전석 문을 강하게 내리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손전등 불빛이 강렬하게 쏟아지면서 우비를 걸친 실루엣이 보였다.
그리고 이내
“경찰입니다!”
라는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또렷이 들려왔다.
내가 간신히 창문을 내리자 애매한 자세로 있던 우리의 모습이 경찰관에게 노출됐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으나 더 들어가면 민통선이라는 경찰관의 말이 먼저 들려왔다. 그러면서 면허증 제시를 요구했다. 전조등을 끄고 출입 통제구역을 향해 가는 우리 차를 순찰차에서 우연히 발견한 경찰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그들 역시 전조등을 끈 채 우리 뒤를 쫓았던 것이었다.
그렇게도 아내가 간절히 바라며 쫓아왔던 비가 반쯤 열린 차창으로 속절없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