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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ann Apr 12. 2022

말하지 못하는

- 스마트 소설 -

늦게 일어난 아이와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정란은 아이를 직접 유치원에 맡기고 오는 길이었다. 

내일은 반드시 유치원 승합차에 태워 보내리라 다짐하지만 이렇게 아이를 직접 데리고 등원시키는 날이 많았다. 집에 가기 전 브런치 카페에 들렀다. 

얼마 전 타운하우스 단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큰 대로변에 새로 생긴 이 카페를 그녀가 가끔 들르곤 했다. 


카페 안의 진한 커피 향이 재즈 음악과 궁합을 잘 이루며 그녀의 코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케이준 샐러드를 항상 사서 집에 가서 먹곤 했는데 오늘은 왠지 매장에 앉아 커피와 함께 크루아상 한 입 먹으며 오전의 여유를 조금 느끼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깨달은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기만의 시간을 즐기며 휴대전화를 매만 작 하고 있는데 매장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힐끗 보았는데도 분명 눈에 많이 익은 여자였다. 

정란이 오랜 기억의 실타래를 푸는데 계산대에서 주문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변하지 않은 그 목소리는 엉킨 실타래를 단번에 풀어 버렸다. 


‘개년’이었다. 


중학교 졸업하고 볼 일 없었던 그녀를 왜 이곳에서 보게 됐는지 짜증보다 겁이 덜컥 났다. 

정란이 한눈에 알아본 그녀는 중학교 시절 이름 대신 또래 아이들에게 개년이라고 불렸었다. 물론 그녀가 안 보는 곳에서 그녀 귀에 들리지 않게 말이다. 최대한 눈에 안 띄게 정란은 카페를 빨리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아직도 무언가 주문 중인 개년을 힐끗거리며 자리를 뜰 준비를 하는데 마음이 다급해서 그런지 물건을 잡는데 자꾸만 떨어졌다. 

두 번째 떨어진 지갑을 얼른 주었다. 그리고 숙였던 몸을 일으키다가 테이블 모서리에 어깨를 부딪쳤다. 

테이블이 순간 들썩하더니 아직 반도 마시지 않은 커피잔이 엎어지면서 테이블 아래로 거침없이 떨어져 버렸다. 어깨가 너무 아팠지만 내색할 시간이 없었다. 


요란한 소리에 카페 직원이 정란을 보았다. 

놀란 여직원은 얼른 달려와 자신이 치우겠다고 말했다. 

정란이 죄송하다는 말도 하는 둥 마는 둥 얼른 자리를 일어서려는데 어느새 그 개년이 와서 앞을 가로막았다.


“얘! 정란! 너 정란이지? 어떻게 여기서 다 만나냐?”


여전히 호탕한 그녀의 목소리에 주눅이 들어 정란은 급한 일이 있어서 그만 일어나야 한다고 말했지만, 오버랩 된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개년의 더 큰 목소리에 그만 묻혀버리고 말았다. 


“야, 나 여기 앉아도 되지?”


그녀는 아까부터 이미 앉아있었다. 

정란이 급한 일이 있어서 빨리 가야 한다고 다시 말했지만, 개년은 들은 체도 안 했다.


“야, 나도 급해. 잠깐 앉아봐. 난 새벽부터 일 나가는 남편 따라 이 동네 집 구경하러 나왔다가 제대로 구경하지도 못하고 허탕만 쳤지 뭐야. 하도 배고파서 이리로 온겨. 나 빨리 먹을 테니 잠깐만 기다려봐. 먹고 같이 나자가!”


그녀가 주문한 음식이 언제 나올지 몰랐다. 게다가 같이 나가자는 말에 당황스러웠다. 

언제나 저렇게 자기중심적인 아이였다. 십수 년이 흘렀지만, 그녀는 변함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정란이 개년을 만난 건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다. 

초등학교에서 워낙 말괄량이였던 친구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그녀는 중학교에 들어와서는 비행 청소년이 돼버렸다. 고등학교 시절엔 소년원까지 갔다왔는 소문을 들었었다. 

정란은 그녀와 같은 중학교에 진학하여 2학년 때 같은 반까지 되었다. 

그때부터 괴롭힘이 시작됐다. 

정란에게는 악몽이었다. 그리고 악몽은 정란이 중학교 3학년 되자마자 이사를 하면서 다행히 끝이 났다. 


“야, 내가 지금 계산해보니 우리 딱 십팔 년 만이다. 어찌 숫자도 딱 씹팔이냐? 아유 씹.팔.”


웃기지도 않는 말장난에 개년은 혼자 까르륵거렸다. 

거침없는 그녀의 목소리가 정란은 심히 거슬렸다.

정란은 카페의 다른 손님들이 모두 자신을 쳐다보는 거 같아 불편했다. 

개년은 주문 나온 음식을 게걸스레 먹으며 정란이 결혼을 언제 했으며 남편은 뭐를 하는지, 애는 몇 명 있는지, 이동네에 언제부터 살았는지 등등 쉴 새 없이 물어 왔다. 


개년에게 중2 아들이 있다는 것에 정란은 놀랐다. 

누구를 닮았는지 공부도 꽤 잘한다며 개년은 묻지도 않은 말에 아들 자랑질이었다. 

입만 열면 모두 거짓말이었던 그녀의 말을 정란은 당최 믿을 수 없었다. 

19살에 아이를 낳은 것이냐고 정란은 물으며 혹시 아빠가 그 오빠였냐고 물었다.


“야, 나한테 오빠가 어디 한둘이었냐? 그 오빠라고만 하면 누굴 말해? 나한테 완전 반한 오빠 중의 가장 나이 많은 오빠였어. 애 아빠가 나랑 열다섯 살 차이. 지금 인테리어 사업하는데 이 동네 공사할 일 있어서 온 거야. 나 여기 예전부터 이사 오고 싶어 했거든. 남편이 마침 이 동네 와서 공사한다길래 집 좀 보러왔는데 공사한답시고 전부 내부를 철거해서 제대로 본 게 없어. 야, 마침 잘 됐다. 나 밥 먹고 너희 집에 좀 가자. 가서 집 구경 좀 시켜줘!”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그녀의 말에 정란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집을 구경시켜달란 말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마구 쿵쾅거렸다.


“미안…. 오늘은 좀 어려울 것 같아. 지금 시어머니 와 계시거든.”


불편한 상황을 만들려고 대충 빨리 둘러댄다는 말이 어쩌면 정란 본인의 평상시 속마음을 그대로 보인 것 같아 자신이 말해놓고도 뜨끔거렸다.


“야, 잘됐네. 이런 데서 십 팔 년 만에 만난 친군데 너희 시어머니도 좋아하시겠지! 어머니 뭐 좋아하시니? 그냥 여기서 뭐 좀 사 갈까?”


“아냐. 이런 거 안 좋아하셔. 그래서 나 혼자 와서 먹던 거였어. 그리고 시어머니가 지금 편찮으셔서 잠시 우리 집에 와 계신 거야. 그러니 다음에 내가 초대할게. 정말 미안.”


정란은 미안하다고 연신 말했지만, 이 말이 지금 맞는 말인지 자신도 긴가민가하였다.

개년과 그렇게 찝찝하게 헤어지고 난 뒤 당장이라도 이사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며칠 안 가서 그녀에게 전화 연락이 왔다. 정란은 그 카페에서 번호를 알려주기 싫었으나 그것만은 즉흥적인 거짓말로 도저히 어찌 피할 수가 없었다.

 

“너희 시어머니 아직 안 가셨니? 달리 전화한 게 아니라, 뭐 부탁 좀 하려고.”


정란의 가슴이 뜨끔 하면서 점점 숨이 가빠지려 하는데 개년의 목소리가 거침없이 이어졌다.


“울 신랑이 그 동네에서 주차할 자리를 찾지 못해서 요새 난리야. 공사 차량이 많아 개인차를 주차할 곳이 너무 없는 거야. 우리 공사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너희 집 주차공간 좀 이용할까 싶어. 신랑이 근처 공용주차장에 주차하는데 온종일 주차비가 장난이 아니지 뭐야. 근데 마침 너 생각이 딱 나는 거야. 웬일이니. 신랑 공사 현장이랑도 가깝고 어차피 네 남편 차 끌고 출근하면 자리 빌 거니 그 자리 우리가 좀 쓸게.”


하루 얼마만이라도 주차비 주고 이용하겠다고 해도 허락할까 말까 하는데 어감이 공짜로 온종일 자신의 집 주차장을 이용하겠다는 개년의 말에 욕지거리가 올라왔지만 어떤 적절한 거절의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럴 때를 대비해 어떤 훌륭한 작가가 ‘애드리브의 정석’이란 책만 기술해 놓았어도 그걸 읽고 따라 했을 터라며 쓰잘머리없는 생각만 난데없이 자꾸 떠올랐다. 


정란의 거친 숨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린 걸 아는지 모르는지 개년은 자꾸만 그놈의 십 팔 년 만에 만난 친구를 우려먹으며 부탁 좀 하자며 계속 채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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