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도 흥미진진한 나의 세계가 있었다
아빠~ 빨리. ‘어? 우유가 어디가찌?’ 해야지
"어, 우유가 어디 갔지?" 감정이 전혀 실리지 않은 대사를 시키는 대로 내뱉었습니다. 딸내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답을 잇습니다. 지유 혼자만의 대본이기 때문에 이 녀석만 재미있습니다. 매번 반복하는 스토리인지라 다음에는 어떤 말을 이어가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괜히 다양성을 꾀해보겠다고 다른 답변이라도 하면 그녀에게 혼이 납니다. 본인 생각 속에 있는 이야기대로 풀어가지 않으면 당황스러운가 봅니다. 곁에서 선유 녀석은 이제 혼자서도 잘 상황극을 연출합니다. 빨리 지유도 자라서 엄마 아빠를 출연자에서 빼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선유가 지유만 했을 때였습니다. 책을 읽어 달라고 가져온 그림책은 저를 매우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글씨가 하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기껏 6페이지 정도 되는 책이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림을 보니 내용은 어릴 적부터 듣고 익숙한 전래동화였습니다. 그 책에 글씨가 있는지 없는지 관심 없는 아이는, 늘 엄마가 읽어준 대로 아빠에게 가져온 것입니다.
“여보, 당신 이거 어떻게 읽었어?”
“그냥, 대충 꾸며서 읽어.”
아니 이걸 어떻게 대충 꾸며서 읽지? ‘옛날 옛날에…’ 로 시작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나? 결국 저는 첫 문장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포기했습니다. 답답했던 색시가 다시 책을 집어 들고 동화책을 읽어(?) 내었습니다. 얼마나 색시가 존경스러웠던지요.
아이들이 좋아하는 인형들이나 장난감들을 무릎 앞에 모아 두고 한껏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을 보면 신기할 따름입니다. 앞뒤 인과관계도 안 맞고 서사구조도 급변하기 일쑤지만 아이의 품 안에서 펼쳐지는 동화의 세계는 늘 평화롭고 흥미진진합니다.
그나저나 저는 왜 그 세계에 함께 하지 못하고 쩔쩔맬까요? 곁에서 지켜보다가 혹시라도 같이 하자며 돌아볼까 봐 조마조마하면서요. 제가 읽은 책과 시청한 TV, 영화 그리고 만난 사람들이 이 친구들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이 자명한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저도 이런 시절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용돈을 모아 하나둘씩 사 모으는 재미가 있었던 G.I 유격대가 떠오릅니다. 그래, 아빠도 이들과 매일 지구를 지켰었지. 좋아하는 캐릭터를 주로 갖추다 보니 자꾸 좋은 편만 많아져서, 미안하지만 가끔은 못생긴 대원들이 악역을 맡기도 했지. 괜찮아 내가 상상해 놓은 세계에서는 병사들도 모두 이해해주었어. 때로는 친구 집에 있는 비행기나 전차가 너무 부러워서 애꿎은 대원들만 괴롭혔었지. 문방구에 등장한 전차를 누가 먼저 사가기라도 할까 봐 매일같이 들락거리며 확인하기도 했구나. 결국 세뱃돈으로 용병 8명어치의 전차를 샀던 날을 잊을 수가 없어. 그날은 밥 먹는 것보다 지구를 지키는 일이 더 중요했지. 밖에 나가지도 않고 하루 종일 전쟁을 치렀던 것 같아.
보고 싶다. 나를 따르던 전사들을.
어찌 된 일인지, 그리고 어느 때부터인지 가늠하기 힘든 시간 속에서 저는 전사들과 헤어졌습니다. 결혼하기 전까지 이사한 적도 없는데, 그토록 좋아하던 장난감들을 어디로 치워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니라 어머니께서 버리셨더라도, 좀처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별로 아쉬운 이별도 아니었나 봅니다. 변한 것은 저 자신이겠지요.
나의 생활 반경이 점점 커지고, 세상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상상력은 줄어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새로운 것들이 익숙한 것이 되고, 익숙한 것이 반복되고 나니 어느새 나만의 세상이 사라져버린렸습니다. 지금 다시 G.I 유격대 대원들을 만나도 예전처럼 지구를 지킬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차라리 우리 아이들에게 나의 세계를 대신해 주도록 맡기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아빠도 같이 하자고 할까 봐 또 불안해하겠지요.
그립네요. 나만의 세상, 자유롭게 만들어가던 제 자신이요.
이미지 참조 http://morguefil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