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너의 그 한 마디
아빠, 나랑 놀아줘.
사장님한테 듣는 가장 무서운 말이 “그동안 수고 많았네.” 라던 농담이 생각납니다. 요즘 지유에게 듣는 가장 무서운 말은 “아빠, 나랑 놀아줘.”입니다. 사실 선유도 요만했을 때 늘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선유는 저보다 엄마가 주로 대응해주었기 때문에 비교적 편하게 보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얘기가 다릅니다.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제가 맡아서 방어전을 펼쳐야 하기 때문이지요.
똑같은 동화책을 매번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지루함, 코드도 맞지 않는 유머 때문에 같이 깔깔거리며 웃지 못하는 당혹감, 한창 자랄 나이의 아이가 내뿜는 에너지를 쫓아가지 못하는 체력, 나이가 들수록 쌓인 경험만큼이나 줄어든 상상력,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감정의 격한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센스 등 어느 것 하나 유리한 조건이 없습니다.
“무슨 놀이 할까?”라는 질문에 언제나 “잠자기 놀이 어때?”라고 제안하던 방법도 이제 안 먹힙니다. 병원 놀이할 때마다 환자 역할을 자원하면서 늘 누워만 있었는데, 요즘은 아픈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소꿉놀이하면 음식 대접받을 수 있어서 좋은데 늘 음식이 다 만들어질 때까지 딴짓하면 안 되고 수박뽀로로당근찌개도 맛있게 먹을 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들어다 놨다 비행기 타기가 제일 신난다는 것을 잘 알지만 이것은 금기입니다. 섣불리 시작했다가는 제가 먼저 지쳐서 죽을지 모릅니다.
한 번은 선배가 “아이들이랑 놀아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놀아야지.”라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 같은 그 말씀에 선배만 아니었으면 소리 질렀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힘들다고!”
아이와 오랫동안 함께 놀면서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것은 모든 아빠들의 로망일 것입니다. 사실 고된 직장생활과 많은 업무 때문에 함께 보낼 수 있는 절대 시간 자체도 부족하지만, 설혹 시간이 생긴다 하더라도 온전히 그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무척 버거운 일입니다. 누구를 탓하겠냐마는 지난번 제 동생과 대화하면서 문득 우리도 부모님과 재미있게 놀았던 어릴 적 추억이 거의 없구나 란 것을 떠올렸습니다. 좋은 변명거리 하나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어찌 되었건 놀아 '주지' 않고 같이 놀려면 나도 즐거운 놀이여야 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것은 이 꼬마들이 함께 즐기지 못하는 것들이고 시간이 지나서 아이들이랑 조금 코드를 맞출 수 있을 만큼 성장하면 이제 녀석들은 친구들하고 놀지 아빠 같은 꼰대 하고는 재미없어하겠지요.
좋은 아빠가 된다는 것은 바람만큼이나 참 품이 많이 들고 고된 일입니다. 같이 노는 것 조차 일이 되어 버리지요. 아이들이 모두 잠든 밤늦은 시간이나 저 혼자 일찍 일어난 이른 아침 시간이 정말 귀하고 달콤한 것은 비단 저만이 아니겠지요.
오늘 저녁에는 인어공주놀이를 해야 합니다. 이틀 전부터 잘 미루어 왔는데, 아침부터 주지시켜 주는 것을 보니 오늘 꼭 해적 역할을 잘 해내야겠습니다. 건투를 빌어주세요.
아이의 시간은 둘로 나뉜다. 심심할 때와 심심하지 않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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