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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귀새끼 Feb 12. 2016

자판기 커피

오늘도 혼자 자판기 커피를 마신다

  주머니에 4백 원이 있다. 4백 원짜리 고급 커피를 마실 수 있겠지만, 언제나처럼 3백 원짜리 일반 커피를 선택한다. 자판기 커피가 고급이면 얼마나 고급이겠는가 하는 나의 철저한 선입견 때문이다. 고급 커피를 사 마실 수 있으면 왜 자판기 앞에 서 있겠는가? 자조는 애써 감춘다. 


  자판기 커피와 친해진 것은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 때였다. 학교에서는 커피가 한 잔에 백 원이었다. 지금은 조금 올랐으려나. 커피라는 음료보다 커피가 허락하는 시간을 활용하는 것이 더 필요한 시기였다.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잠깐이라도 후배들과 관계를 맺어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커피 한 잔 할래? 다행히 자판기 커피 한 잔이 제공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으니, 응하는 후배들도 부담스럽지 않았으리라. 

 무언가 대단한 의미를 부여한 것 같다. 사실은 군대에서 보낸 시간만큼 멈춰 버리고 게을러진 머리를 각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가장 싸게 먹히는 수단이었다. 혼자서도 자주 자판기 앞에 섰고 지나가는 후배들과 동기들과 인사할 때마다 괜히 한 마디 건넨다. 

  커피 한 잔 할래? 아까도 마셨어요. 응 사실 나도 아까 마셨어. 

  너무 많이 마시니까 각성효과는커녕 인이 박혔는지 늘 수업시간은 졸리기 일쑤였고, 나중에는 프림을 뺀 설탕 커피를 즐겨 마셨다. 조금 더 독한 것을 찾기 시작했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아메리카노를 사 마실 수 있다. 자판기 커피보다 훨씬 비싼 만큼 더 많은 시간과 더 좋은 공간을 누린다. 다른 다양한 에스프레소베이스 커피들이 있음에도 늘 아메리카노와 에스프레소만 마신다. 졸업한지 십 년이 넘었고 그만큼 커피를 마셨지만, 커피 맛을 예민하게 느낄 정도의 내공은 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커피를 사고 커피는 내게 시간과 공간 그리고 친구를 만들어 주었다. 아마 내가 필요한 것도 그것이었을 터이다. 그래도 커피가 좋다고 한다.


  혼자 있는 이 시간에는 자판기 커피가 좋다. 


  담배가 간절히 필요할 때가 있었다. 군대에서 사역할 때나 직장에서 회사 돌아가는 일에 밝으려면 커피보다는 담배가 더 효과적이다. 그만큼 절실하지는 않아서였는지 담배는 배우지 않았다.  요즘처럼 담배에게 허락된 시간과 관계도 녹록지 않은 때에는 애연가들이 안쓰럽다. 


  조금 이따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볼까. 커피 한 잔 하러 갈게. '다음에 밥 한 번 먹자'라는 말보다는 더 신빙성이 있으리라. 바쁜 일상 속에서 식사 시간 외에 허락할 여유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밥 먹는 것보다 짧은 시간에도 더 많은 것을 그대와 채워갈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 때문에 커피를 선택한다. 


  커피를 다 마셨다. 아니 사실은 이미 마셔버렸지만, 종이컵을 손에 놓지 않았다. 덕분에 추억도 떠올리고 친구와 연락해 봐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내가 커피에게 늘 요구하는  그만큼이다. 실망시키지 않아서 고맙다. 





지금 내가 원한 것은 커피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지 참조 : pixabay.com/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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