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귀새끼 Sep 05. 2016

아이 '둘' 아빠

결국 모든 것이 처음이다

아빠, 언니는 왜 나랑 안 놀아줘?

  큰 아이에게 언니 노릇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지 이틀 만에 둘째에게 이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후회가 밀려옵니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토라진 아이를 달래 보지만, 언니가 같이 놀아주지 않은 이상 기분이 좋아질 리 만무합니다. 결국 또 부모 잘못입니다. 


  첫 아이를 키우고 나면 둘째는 좀 수월하리라 기대했습니다. 한번 키워 본 경험이 많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확실히 처음에 뭐든지 조심스러웠던 두려움은 없어졌습니다. 너무 무던해진 것인지, 조금은 막 키우는 것 아닌가 싶어 둘째에게 미안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뿐. 사실 모든 것이 또 새로운 시작이요 또 다른 경험입니다. 아이 둘의 부모 말이지요.


  고백하건대 첫아이를 키울 때는 편했습니다. 거의 모든 일을 색시가 했기 때문입니다. 나쁜 남편, 나쁜 아빠입니다. 아이가 둘이 생기고 나서는 저도 양심이 있지, 적어도 하나씩은 맡아서 돌봐야겠지요. 어쩌면 아이를 키워는 것도 이제 시작인지 모릅니다. 아이 둘 재우기, 아이 둘 데리고 외출하기, 아이 둘 씻기기, 아이 둘이랑 놀기, 아이 둘 먹이기 등등. 그렇게 둘째의 나이만큼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이가 하나일 때보다 둘이 되었으니 시간이나 물리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것 이상의 고난이 찾아옵니다.

 

  바로 둘째라는 전혀 다른 인종과의 만남이 그렇습니다. 

  언니가 하는 것은 뭐든지 따라 해야 하고, 언니가 갖고 있는 것은 뭐든 갖고 싶고, 언니의 행동 하나하나 흉내 내면서, 언니가 가는 곳마다 동행하고 싶어 하는 둘째 말이지요. 그러면서 성격이나 취향은 어쩜 그렇게 정 반대인지 먹는 것, TV 보는 것 하나하나 맞춰주기도 힘들고 늘 서로 싸우기 바쁩니다. 하나 있을 때에는 잘잘못만 가리면 되었지만, 이제는 중재 역할까지 해야 합니다. 둘째 비위 맞추기도 힘든데, 첫째 눈치까지 봐야 하니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늘 둘 사이에서 공평하게 대해야 합니다. 물론 나만 공정해봐야 소용없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언제나 서로가  견주었을 때 손해 본다고 생각하니까요.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가 눈을 감거나 가린 이유는 알려진 것처럼 공정한 심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꼴 저 꼴 보기 싫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매번 뭐가 그렇게 또 서운한지 “아빠, 미워!” 소리도 가장 익숙한 사자성어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둘째는‘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를 반복하고 언니는 ‘동생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둘 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소리입니다. 둘째의 바람대로라면 셋째라는 또 다른 신인류가 생겨나겠지요. 둘째는 이제 ‘언니 있는 동생’에서‘둘 사이 끼인’으로, 첫째는 ‘동생이 있는 언니’에서 ‘맏언니’로 변신할 터입니다. 제발 그것만은 이루어지지 않길 바랍니다. 


  매번 투닥거리며 싸우고 난 후, “나중에 엄마 아빠 죽으면 너희 자매만 남게 돼. 그럼 누구보다도 믿고 서로 의지해야 할 가장 가까운 사이인 것이야.”라고 얘기해 줍니다. 8살, 5살 아이들에게는 하나마나 한 소리입니다. 지금도 가끔 사춘기 때 둘이서 싸워댈 생각을 하고 그때 어떻게 해야 하나 겁부터 날 때가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두렵고 새로운 경험을 거듭해야 할까요.


 



동생 내외에게 엊그제 셋째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이미지 참조 : https://pixabay.com

매거진의 이전글 언니 노릇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