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보다 센 놈 앞에선 잘 조절된다
"당신도 짜증 나면 지유한테 특히 화 많이 낸다. 알아?"
색시의 질문에, 내가? 라며 짐짓 모른 척 대답했지만,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평소에 화를 잘 내지 않습니다. 천사같이 착해서가 아닙니다. 분노의 감정을 적절하게 잘 표현할 줄 모릅니다. 자라면서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이나 상황이 별로 없었던 탓일 겁니다. 막상 화를 낸 상황이 몹시 불편하고 싫어서 대부분 그냥 참고 맙니다.
그런 저도 딸들한테는 화를 잘 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짜증을 잘 냅니다.
아이들이 그런 모습을 무서워하는지, 올바른 훈육의 효과는 있는 것이지 잘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평소의 다른 이들 앞에서 비교적 순한 우리 아빠가 우리한테 만큼은 쉽게 화를 낸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지적을 색시한테 들었던 이유는 색시가 유난히 피곤한 날, 평소와 다름없이 고집 피우고 떼쓰는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어 제가 핀잔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색시는 저도 마찬가지라 되받아 친 것이지요.
알지. 그런데 정말 나는 왜 우리 딸들한테만 쉽게 화를 내는 것일까?
기대치가 높은 것인가? 일곱 살 네 살인 아이들에게?
부모님이 엄하고 무서운 가정환경에서 자란 탓인가? 내가?
다른 집 아이들 바라볼 때는 그러려니 하잖아. 부모 되기, 부모 하기 힘든 것도 알고 있잖아?
그런데, 왜 그러지?
깊이 고민할 필요 없었습니다. 그냥 '내 딸'이라 그랬습니다. 내 딸이니까 잘 가르쳐야지. 내 딸이니까 싫은 소리도 할 줄 알아야지. 내 딸이니까 아빠 마음 이해하겠지. 내 딸이니까 내 말을 들어야지. 내 딸이니까 내가 화를 내어도 참아야지. 내 딸이 아직 어리니까. 내 딸이니까...
돌아보니 참 비겁합니다. 타인을 대할 때는 배려랍시고 웬만한 상황에서는 참고 넘기면서, 나보다 약한 그리고 내 소유처럼 생각하는 딸들한테는 함부로 하는 비겁한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같이 대거리를 하면서 싸우는 것이 차라리 마음 편했습니다. 점점 그 횟수가 잦아지면서 상대적으로 더 큰 목소리를 가지고 더 큰 몸집으로 위협하는 힘센 자의 상황이 익숙해졌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스개로 분노조절장애는 자기보다 힘센 자 앞에서는 잘 조절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미안해요. 지유.
아빠가 좀 더 참을 수 있었을 텐데.
미안해요. 선유.
아빠가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은 아이의 기분이나 생각을 이해하고 따라준다는 것뿐이 아니겠지요. 동등한 인격체로 아이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아닐까요?
화를 내지 않고 자기주장하는 법을 아이들이 배울 수 있었으면 더 좋겠습니다. 아이들이 약자에게만 화를 내는 비겁한 사람이 되면 안 되잖아요. 사실 저부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