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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바스 Aug 02. 2021

한달 생활비 5000루블

환전하면대략 20만원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부재했던 탓에 경제적 책임은 오롯이 어머니에 몫이었다. 거기다 몸이 안 좋으신 외할머니의 생활비까지 충당하고 있었으니 어머니의 어깨는 무거웠다. 이런 상황 가운데 어머니는 전투적으로 살아가셨다. 쌈짓돈을 가지고 서울 월계동에 신발 가게를 열어 장사를 하기도 하고 일본어에 재능이 있던 터라 통역일을 다니며 강사로 활동하셨다.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구두쇠가 되셨다. 옷, 가전, 식기 등 물건은 기본 몇 년씩 쓰는 건 당연했고 장을 볼 때면 무조건 시장에 다니시며 "너무 비싸요, 천 원만 빼줘요"라는 말과 함께 알뜰하게 장을 봐오시곤 하셨다.


부동산에 대한 안목이 좋았던 어머니는 임장을 다니며 괜찮은 집들을 자주 사고팔았는데 어머니는 나를 꼭 데리고 다니셨다. 조금이라도 더 비싸게 팔려는 집주인에게 어떻게 해서든 가격을 조금 더 깎으려는 어머니의 노력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래도 어머니는 부동산도 사고팔며 하며 집안 평수도 점점 넓혀 갔다. 서울 옥수동에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로 이사를 가기도 하고 중학교 시절에는 이태원 중심가에 있는 3층 높이의 빌라를 구입하기도 했다. 새로 지어진 빌라로 1,3층은 원룸으로 지어져 월세를 받을 수 있는 집이었다. 우리는 2층 넓은 집에 들어가 살게 됐는데 베란다 뒤로는 자그마한 마당이 있었고 주변에 나무가 많아 외부에서 볼 수 없었던 곳이었다.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었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아끼고 또 아끼셨다.

 

알게 모르게 어머니의 경제관념은 나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구두쇠가 되기도 하고 물건을 살 때면 "깎아주세요"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가정형편이 어느 정도 풍족해졌지만 나는 아직 '우리 집 형편은 어렵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머니에게 경제적으로 조금이나마 보탬이 돼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있었다.


돈은 무조건 더 아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유학까지 예정돼 있었으니 어머니 혼자 모든 걸 책임지는 것은 경제적으로 부담이 될 것이다. 입학 예정이었던 연극대학교는 국내 대학 등록금의 2배 정도 비쌌고 거기다 월마다 나가는 기숙사비를 더한다면 지출이 상당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열심히 공부하고 돈을 아껴 쓰는 것 밖에는 없었다. 




나는 한 달 생활비를 20만 원만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현지 인터넷 커뮤니티를 참고하니 물가는 서울과 비슷한 수준이었고 음식을 해 먹는다면 적은 돈으로 생활하기에는 어려울 것도 없어 보였다. 식비 10만 원, 교통비 2만 원, 핸드폰 요금 1만 원, 인터넷 3만 원, 생활비 4만 원으로 총 20만 원으로 지출 목록을 작성했다. 어머니께도 말씀드리니 부족한 거 아니냐며 필요하면 더 주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완강하게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라고 맹세하며 이야기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3개월 동안 매달 20만 원으로 아침, 점심, 저녁, 교통비, 간식, 핸드폰 요금으로 사용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생활은 극단적으로 변해갔다. 마트에서 배포하는 세일 품목 전단지를 항상 예의 주시했고 거리가 5km 내외라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조건 걸어 다녔다. 건강한 두 다리가 있는 이상 종이 지도를 들고 다니며 걷고 또 걸었다.



나의 식단은 극단적이었다. 가장 싼 야채인 감자, 양파, 당근을 사 온 뒤 야채 볶음, 야채 고추장찌개, 야채 소시지 볶음을 만들고 고추장, 간장, 마요네즈에 밥을 비벼 먹었다. 간식은 오롯이 제일 싼 과자를 사다 먹었고 외식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자린고비를 생각하며 시원한 콜라가 먹고 싶을 때면 물을 콜라로 생각하고 마셨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지출이 너무도 많았다. 어학당을 다니며 여러 나라 친구들과 카페에 가거나 점심식사를 하게 될 때면 큰 부담이었다. 거기다 종종 파티에 초대받기라도 하면 최소한의 선물은 사가야 했으니 늘 부담이었다. 


어느 카페를 가던 제일 싼 음료는 에스프레소였다. 그렇게 나는 늘 에스프레소를 시켜 먹곤 했는데 외국인 친구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고풍스럽게 쓴 커피를 홀짝홀짝 마셨다. 그 쓴 커피 한 방울이 아까워 결코 단 한 번도 남긴 적이 없었고 구내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기라도 하면 제일 싼 러시아 파이(пирожок)를 주문하여 먹었다. 나는 그런 생활이 전혀 불편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매일 쓰디쓴 에스프레소를 마셔도 친구들과의 모임에 빠진 적 없었고 돈은 부족했지만 아끼고 생활한다는 성취감에 나름 행복했다. 


러시아 생활 4개월쯤 접어들자 감자, 양파, 당근을 더 이상 먹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지지고, 볶고, 끓이고, 삶고 여러 방법으로 요리를 해봐도 질려서 먹을 수가 없었다. 고추장에 밥을 비벼먹거나, 마요네즈, 간장 등 여러 소스에 비벼먹는 것도 한계치에 다 달았다. 고기와 과일도 실컷 먹고 싶었고 종종 맥도널드나 서브웨이에 가서 햄버거와 콜라도 사 먹고 싶었다. 결국 버티다 버티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께 연락을 드려 생활비를 올려다라고 부탁드렸다. 



어떻게든 집안 가정살림에 보템이 되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더 이상 부담드리고 싶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왠지 모르게 죄송했다. 누군가에게는 고작 20만 원의 생활비를 더 올리는 것이었지만 나에게는 200만 원처럼 느껴졌다. 


확실히 40만 원의 생활비는 넉넉했다. 먹고 싶은걸 먹을 수 있었고 꼭 에스프레소를 시켜먹지 않아도 됐다. 걷고 싶지 않을 때면 버스를 타고 다녀도 됐고 종종 맥도널드에 갈 수도 있었다.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는 삶은 정말 행복했다. 무조건 아껴서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벗어날 수도 있었고 친구들의 파티 초대가 있을 때면 부담 없이 선물을 살 수 있었다. 


그때 크게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다. 어떤 물건이건 '싼 건 비지떡이다'라는 사실이다. 모든 제품의 가격에는 그에 합당한 가치가 정해져 있다. 당연 거품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적절한 가격은 어느 정도의 퀄리티를 보장한다. 그리고 돈을 아끼는 것도 좋지만 적정선에서 사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러시아 유학은 연극 공부 외에도 나 스스로에게 경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어떤 것이 합리적인 소비이며 내가 가진 예산을 어떻게 운영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스스로 책임져야 했던 시간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구두쇠지만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며 조금이나마 돈을 쓸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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